이 글은 (unix)4mac님의 블로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http://ilovja.com/wp/2005/06/23/214/1/
June 23, 2005
스티브 잡스 졸업 축사
이 연설의 동영상 링크입니다
http://news-service.stanford.edu/news/2005/june15/videos/51.html
세계 명문대로 꼽히는 대학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오늘 이 자리만큼 대학졸업식을 가까이서 목격한 적은 없습니다. 오늘은 제 인생에서 일어났던 세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뿐입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딱 세가지 이야기죠. 들려 드릴 첫번째 이야기는 점 잇기에 관한 것입니다. 리드 칼리지 Reed College에 입학한 지 6개월만에 자퇴를 했으나 일년 반 정도 청강생활을 하면서 머물렀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가 자퇴를 했을까요?
이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 갑니다. 생모는 당시 대학원을 다니던 미혼모였는데, 저를 양자로 보낼 결심을 하셨죠. 어머니는 제가 대졸학력을 가진 부부에게 입양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 마자 변호사 부부가 입양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태어나기 직전에 이 부부는 여자 아이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은 한밤중에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셨죠. “예정에 없던 사내 아이가 태어났는데 받으시겠습니까?”
양부모님의 대답은 “물론입니다.” 였습니다. 그런데 저를 낳아주신 어머님은 나중에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입양동의서에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양부모님께서 저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고 약속을 한 지 몇달이 지나서야 친어머님은 마음이 누그러지셨죠. 그로부터 17년후에 대학에 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순진하게도 스탠포드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택했습니다. 일반 근로자였던 양부모님이 저축한 모든 돈이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6개월 후,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대학 교육이 어떤 도움이 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을 까먹고 있었죠. 그래서 자퇴를 결심했고, 모든 일이 잘 될거라고 믿었습니다. 당시에는 꽤 두려웠지만, 돌아 보면, 제가 인생에서 내린 최고의 결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자퇴를 하고 나니, 관심없었던 필수과목 대신 듣고 싶었던 강의를 청강할 수 있었습니다. 낭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기숙사에 방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네 집 거실에서 잠을 잤고, 콜라 빈병을 모아 재활용센터에 갖다 주고 병당 5센트를 받아서 먹을 것을 샀고,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은 양질의 음식을 섭취하기 위해 십 킬로미터를 걸어서 헤어 크리슈나 the Hare Krishna 사원(역주: 힌두교 계열)의 일요 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식사는 정말로 좋았습니다. 제 호기심과 직감으로 얻는 대부분의 경험은 이후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만큼 소중한 재산이 되었습니다. 예를 한가지 들어 보지요: 그당시 리드 칼리지에서는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교정 곳곳의 포스터, 서랍의 레이블 마다 아름다운 서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자퇴를 했으니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서체 수업을 듣기로 작정했습니다. 세리프와 산 세리프 서체를 배웠는데 서로 다른 자모의 결합에 따라서 자간을 달리 둠으로써 훌륭한 서체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웠고, 역사적으로 유명했으며, 과학은 따라 갈 수 없는 섬세한 예술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매료되었죠. 이것이 내 인생에서 어떤 식으로 적용될 것인가 하는 한 가닥 희망 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십 년 후,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설계할 때, 의미가 와 닿았습니다. 매킨토시와 접목을 시켰을 때, 미려한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탄생했으니까요. 제가 만약에 그때 서체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더라면, 매킨토시는 다중 서체나 비례적으로 자간을 조정하는 글꼴을 가지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윈도우즈가 맥을 그대로 따라 했으니까, 매킨토시 뿐만 아니라 그 어떤 퍼스널 컴퓨터도 비슷한 처지에 놓였겠죠. 자퇴를 하지 않았더라면, 서체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을 테니, 퍼스널 컴퓨터는 오늘날과 같은 훌륭한 인쇄술을 가지지도 못했을 겁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 있었을 때에는 이런 미래의 점들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후, 과거를 돌아 보았을 때, 모든 게 분명히 보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미래의 점들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점들만 이을 수 있는 거죠. 그러므로 이런 점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이어진다고 믿어야 합니다.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 그 무엇이건 간에 믿어야 합니다. 이런 제 인생관은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종국에는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대한 것입니다.
운 좋게도 저는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일찍 찾았습니다.
제 나이 스무 살에 워즈 Woz와 같이 부모님 차고에서 애플 컴퓨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10년 안에 애플은 사천 명 이상의 직원을 가진 20억불 짜리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창사 이래 최고의 걸작품인 매킨토시를 전년도에 출시했고 그때 제 나이가 서른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해고를 당했죠. 스스로 창업한 회사로부터 어떻게 해고를 당할 수 있느냐구요? 애플의 규모가 점점 커감에 따라 저와 함께 회사를 운영해 나갈 재능이 걸출하다고 생각한 사람을 영입했고, 한 해 정도는 잘 굴러 갔습니다. 그러다가 회사의 장래에 관한 견해가 엇갈리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불화로 번졌습니다. 그런데 이때, 회사의 이사진들은 그 사람 편을 들었죠. 그래서 나이 서른에 쫓겨 났던 겁니다. 그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말입니다. 제 인생의 초점이 사라졌고, 그것은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 무엇을 해야 좋을 지 앞이 깜깜했습니다. 마치 제쪽으로 오던 바톤을 놓친 것처럼 한 세대 전의 기업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데이빗 패커드(역주; 휴렛 패커드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역주; 인텔의 공동 창업자)를 만났고 볼쌍 사나운 제 실패에 대해 사과를 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아주 공공연한 실패작이라 차라리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을 칠까 하는 생각까지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여전히 제가 하던 일을 사랑했습니다. 애플에서 있었던 사건은 그 사랑을 조금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축출당했지만, 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기로 다짐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 당한 사건은 돌아 보면 제 인생에서 일어났던 최고의 사건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성공이라는 무거움을 벗고, 확신은 전보다 줄었지만, 다시 처음 시작한다는 가벼움으로 임했습니다. 해방된 기분을 만끽하며 제 인생의 가장 창의적인 시기로 접어 들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간, NeXT, 그리고 Pixar를 창업했고, 제 아내가 될 멋진 여자와 사랑에 빠졌죠. 픽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Toy Story를 만들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반전으로 애플은 NeXT를 인수했고, 저는 애플로 돌아 왔고, NeXT에 개발했던 기술은 현재 애플 르네상스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로렌스와 저는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죠. 애플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확신합니다. 그것은 지독하게 입에 쓴 약이었지만, 그 환자는 그 약이 필요했나 봅니다. 때로 삶은 당신의 머리를 벽돌로 칩니다. 신념을 버리지 마세요. 제가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는 하는 일을 사랑했기 때문임을 이제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 하듯이 일도 그런거죠. 자신이 하는 일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고, 진정한 만족을 얻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가 훌륭한 일이라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것을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아 보세요.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마세요. 가슴으로 알 수 있는 모든 일이 그렇듯, 일단 찾았으면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일인지 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위대한 사랑처럼, 해를 거듭할 수록 점점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일을 찾을 때까지 계속 탐색을 하십시오. 현재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열 일곱 살때,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마지막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옳은 길로 들어 설 것이다.” 이 말에 감명을 받은 저는 그로부터 33년 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이 일을 할 것인가?” “아니오.” 라는 대답이 계속 나온다면, 무엇인가를 변경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야 말로 제가 인생의 중대 결정을 내릴 때 의지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외부의 기대, 자부심, 수치심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은 죽음의 면전에서 밑으로 가라 앉고, 진실로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은 잃어버릴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입니다.
당신은 이미 벌거 벗은 상태입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일년 전쯤에 저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 30반에 CT 촬영을 했는데, 췌장에 종양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전 췌장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이 암은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며, 길어야 석달에서 여섯달이라고 했습니다. 주치의는 집에 가서 주변을 정돈하라고 했는데, 환자들에게 죽을 채비를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식들에게 앞으로 10년 동안 하리라 생각했던 이야기를 불과 몇 달 안에 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사를 잘 마무리해서 가족들이 받을 충격을 가능한한 줄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작별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불치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온종일을 보냈습니다. 그날 저녁, 조직검사를 받았는데, 목구멍으로 통해서 위장을 거쳐 장까지 내시경을 넣고, 췌장에 바늘을 꽂아서 종양에서 세포를 채취했습니다.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현미경으로 조직세포를 본 결과 아주 드문 췌장암의 한 종류로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것으로 드러나 의사들이 눈물을 글썽거렸다고 당시 곁에 있던 아내가 말했습니다. 저는 그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때만큼 죽음의 문전에 가까이 가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 몇 십년동안 다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일을 겪고 나니, 죽음 자체가 유용할 수 있지만 순전히 지적인 개념이었던 시절보다 좀 더 확신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가고 싶은 사람조차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기를 원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어느 누구나 도달하는 목적지입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과도 같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죽음은 ‘삶’의 변화물질입니다 옛것을 치우고, 새것을 위한 공간을 만듭니다. 지금 그 ‘새것’은 바로 여러분이지만, 언젠가 여러분도 ‘옛것’이 되고, 치워지겠죠. 지나치게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면서 낭비를 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이의 생각이 빚어낸 결과가 구속하는 삶, 즉 도그마에 빠지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의 목소리가 다른 이의 의견이 내는 소음에 익사당하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 있게 당신의 가슴과 직감이 하는 말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는 어떤 식으로든 여러분이 진정 무엇이 되고자 하는 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이외의 나머지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전체 지구 목록 The Whole Earth Catalog 이라는 굉장한 책이 있었는데 우리 세대 바이블 중 하나였죠. 지금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맨로팍 Menlo Park에 살던 스튜엇 브랜드 Stewart Brand 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이 책에 자신만의 시적 영감을 불어 넣었죠. 1960년 후반이었는데 퍼스널 컴퓨터나 탁상 출판이 출현하기 전이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만들었습니다. 구글이 존재하기 35년전에 있었던, 책으로 된 구글 같은 것이었죠. 스튜엇과 그 팀은 전체 지구 목록의 몇가지 증보판을 냈고, 수명을 다했을 무렵, 최종판을 출판했습니다. 1970년 중반이었고, 그때 저는 지금의 여러분 나이였습니다. 최종판 뒷쪽 커버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모험심이 넘치는 청춘이라면 그 길에서 히치하이킹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을 겁니다. 그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배고픔과 함께. 바보스러움과 함께.”
그것은 그들의 마지막 작별 인사였습니다. 배고픔과 함께. 바보스러움과 함께. 늘 제 자신이 그러기를 소망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새출발을 위해 졸업을 하고, 저는 여러분께 똑같은 소망을 보냅니다.
배고픔과 함께. 바보스러움과 함께.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연설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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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3, 2005
스티브 잡스 졸업 축사
이 연설의 동영상 링크입니다
http://news-service.stanford.edu/news/2005/june15/videos/51.html
세계 명문대로 꼽히는 대학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오늘 이 자리만큼 대학졸업식을 가까이서 목격한 적은 없습니다. 오늘은 제 인생에서 일어났던 세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뿐입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딱 세가지 이야기죠. 들려 드릴 첫번째 이야기는 점 잇기에 관한 것입니다. 리드 칼리지 Reed College에 입학한 지 6개월만에 자퇴를 했으나 일년 반 정도 청강생활을 하면서 머물렀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가 자퇴를 했을까요?
이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 갑니다. 생모는 당시 대학원을 다니던 미혼모였는데, 저를 양자로 보낼 결심을 하셨죠. 어머니는 제가 대졸학력을 가진 부부에게 입양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 마자 변호사 부부가 입양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태어나기 직전에 이 부부는 여자 아이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은 한밤중에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셨죠. “예정에 없던 사내 아이가 태어났는데 받으시겠습니까?”
양부모님의 대답은 “물론입니다.” 였습니다. 그런데 저를 낳아주신 어머님은 나중에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입양동의서에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양부모님께서 저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고 약속을 한 지 몇달이 지나서야 친어머님은 마음이 누그러지셨죠. 그로부터 17년후에 대학에 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순진하게도 스탠포드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택했습니다. 일반 근로자였던 양부모님이 저축한 모든 돈이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6개월 후,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대학 교육이 어떤 도움이 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을 까먹고 있었죠. 그래서 자퇴를 결심했고, 모든 일이 잘 될거라고 믿었습니다. 당시에는 꽤 두려웠지만, 돌아 보면, 제가 인생에서 내린 최고의 결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자퇴를 하고 나니, 관심없었던 필수과목 대신 듣고 싶었던 강의를 청강할 수 있었습니다. 낭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기숙사에 방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네 집 거실에서 잠을 잤고, 콜라 빈병을 모아 재활용센터에 갖다 주고 병당 5센트를 받아서 먹을 것을 샀고,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은 양질의 음식을 섭취하기 위해 십 킬로미터를 걸어서 헤어 크리슈나 the Hare Krishna 사원(역주: 힌두교 계열)의 일요 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식사는 정말로 좋았습니다. 제 호기심과 직감으로 얻는 대부분의 경험은 이후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만큼 소중한 재산이 되었습니다. 예를 한가지 들어 보지요: 그당시 리드 칼리지에서는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교정 곳곳의 포스터, 서랍의 레이블 마다 아름다운 서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자퇴를 했으니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서체 수업을 듣기로 작정했습니다. 세리프와 산 세리프 서체를 배웠는데 서로 다른 자모의 결합에 따라서 자간을 달리 둠으로써 훌륭한 서체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웠고, 역사적으로 유명했으며, 과학은 따라 갈 수 없는 섬세한 예술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매료되었죠. 이것이 내 인생에서 어떤 식으로 적용될 것인가 하는 한 가닥 희망 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십 년 후,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설계할 때, 의미가 와 닿았습니다. 매킨토시와 접목을 시켰을 때, 미려한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탄생했으니까요. 제가 만약에 그때 서체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더라면, 매킨토시는 다중 서체나 비례적으로 자간을 조정하는 글꼴을 가지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윈도우즈가 맥을 그대로 따라 했으니까, 매킨토시 뿐만 아니라 그 어떤 퍼스널 컴퓨터도 비슷한 처지에 놓였겠죠. 자퇴를 하지 않았더라면, 서체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을 테니, 퍼스널 컴퓨터는 오늘날과 같은 훌륭한 인쇄술을 가지지도 못했을 겁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 있었을 때에는 이런 미래의 점들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후, 과거를 돌아 보았을 때, 모든 게 분명히 보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미래의 점들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점들만 이을 수 있는 거죠. 그러므로 이런 점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이어진다고 믿어야 합니다.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 그 무엇이건 간에 믿어야 합니다. 이런 제 인생관은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종국에는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대한 것입니다.
운 좋게도 저는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일찍 찾았습니다.
제 나이 스무 살에 워즈 Woz와 같이 부모님 차고에서 애플 컴퓨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10년 안에 애플은 사천 명 이상의 직원을 가진 20억불 짜리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창사 이래 최고의 걸작품인 매킨토시를 전년도에 출시했고 그때 제 나이가 서른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해고를 당했죠. 스스로 창업한 회사로부터 어떻게 해고를 당할 수 있느냐구요? 애플의 규모가 점점 커감에 따라 저와 함께 회사를 운영해 나갈 재능이 걸출하다고 생각한 사람을 영입했고, 한 해 정도는 잘 굴러 갔습니다. 그러다가 회사의 장래에 관한 견해가 엇갈리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불화로 번졌습니다. 그런데 이때, 회사의 이사진들은 그 사람 편을 들었죠. 그래서 나이 서른에 쫓겨 났던 겁니다. 그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말입니다. 제 인생의 초점이 사라졌고, 그것은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 무엇을 해야 좋을 지 앞이 깜깜했습니다. 마치 제쪽으로 오던 바톤을 놓친 것처럼 한 세대 전의 기업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데이빗 패커드(역주; 휴렛 패커드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역주; 인텔의 공동 창업자)를 만났고 볼쌍 사나운 제 실패에 대해 사과를 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아주 공공연한 실패작이라 차라리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을 칠까 하는 생각까지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여전히 제가 하던 일을 사랑했습니다. 애플에서 있었던 사건은 그 사랑을 조금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축출당했지만, 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기로 다짐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 당한 사건은 돌아 보면 제 인생에서 일어났던 최고의 사건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성공이라는 무거움을 벗고, 확신은 전보다 줄었지만, 다시 처음 시작한다는 가벼움으로 임했습니다. 해방된 기분을 만끽하며 제 인생의 가장 창의적인 시기로 접어 들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간, NeXT, 그리고 Pixar를 창업했고, 제 아내가 될 멋진 여자와 사랑에 빠졌죠. 픽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Toy Story를 만들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반전으로 애플은 NeXT를 인수했고, 저는 애플로 돌아 왔고, NeXT에 개발했던 기술은 현재 애플 르네상스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로렌스와 저는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죠. 애플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확신합니다. 그것은 지독하게 입에 쓴 약이었지만, 그 환자는 그 약이 필요했나 봅니다. 때로 삶은 당신의 머리를 벽돌로 칩니다. 신념을 버리지 마세요. 제가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는 하는 일을 사랑했기 때문임을 이제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 하듯이 일도 그런거죠. 자신이 하는 일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고, 진정한 만족을 얻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가 훌륭한 일이라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것을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아 보세요.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마세요. 가슴으로 알 수 있는 모든 일이 그렇듯, 일단 찾았으면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일인지 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위대한 사랑처럼, 해를 거듭할 수록 점점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일을 찾을 때까지 계속 탐색을 하십시오. 현재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열 일곱 살때,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마지막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옳은 길로 들어 설 것이다.” 이 말에 감명을 받은 저는 그로부터 33년 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이 일을 할 것인가?” “아니오.” 라는 대답이 계속 나온다면, 무엇인가를 변경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야 말로 제가 인생의 중대 결정을 내릴 때 의지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외부의 기대, 자부심, 수치심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은 죽음의 면전에서 밑으로 가라 앉고, 진실로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은 잃어버릴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입니다.
당신은 이미 벌거 벗은 상태입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일년 전쯤에 저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 30반에 CT 촬영을 했는데, 췌장에 종양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전 췌장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이 암은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며, 길어야 석달에서 여섯달이라고 했습니다. 주치의는 집에 가서 주변을 정돈하라고 했는데, 환자들에게 죽을 채비를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식들에게 앞으로 10년 동안 하리라 생각했던 이야기를 불과 몇 달 안에 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사를 잘 마무리해서 가족들이 받을 충격을 가능한한 줄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작별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불치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온종일을 보냈습니다. 그날 저녁, 조직검사를 받았는데, 목구멍으로 통해서 위장을 거쳐 장까지 내시경을 넣고, 췌장에 바늘을 꽂아서 종양에서 세포를 채취했습니다.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현미경으로 조직세포를 본 결과 아주 드문 췌장암의 한 종류로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것으로 드러나 의사들이 눈물을 글썽거렸다고 당시 곁에 있던 아내가 말했습니다. 저는 그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때만큼 죽음의 문전에 가까이 가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 몇 십년동안 다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일을 겪고 나니, 죽음 자체가 유용할 수 있지만 순전히 지적인 개념이었던 시절보다 좀 더 확신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가고 싶은 사람조차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기를 원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어느 누구나 도달하는 목적지입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과도 같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죽음은 ‘삶’의 변화물질입니다 옛것을 치우고, 새것을 위한 공간을 만듭니다. 지금 그 ‘새것’은 바로 여러분이지만, 언젠가 여러분도 ‘옛것’이 되고, 치워지겠죠. 지나치게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면서 낭비를 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이의 생각이 빚어낸 결과가 구속하는 삶, 즉 도그마에 빠지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의 목소리가 다른 이의 의견이 내는 소음에 익사당하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 있게 당신의 가슴과 직감이 하는 말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는 어떤 식으로든 여러분이 진정 무엇이 되고자 하는 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이외의 나머지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전체 지구 목록 The Whole Earth Catalog 이라는 굉장한 책이 있었는데 우리 세대 바이블 중 하나였죠. 지금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맨로팍 Menlo Park에 살던 스튜엇 브랜드 Stewart Brand 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이 책에 자신만의 시적 영감을 불어 넣었죠. 1960년 후반이었는데 퍼스널 컴퓨터나 탁상 출판이 출현하기 전이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만들었습니다. 구글이 존재하기 35년전에 있었던, 책으로 된 구글 같은 것이었죠. 스튜엇과 그 팀은 전체 지구 목록의 몇가지 증보판을 냈고, 수명을 다했을 무렵, 최종판을 출판했습니다. 1970년 중반이었고, 그때 저는 지금의 여러분 나이였습니다. 최종판 뒷쪽 커버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모험심이 넘치는 청춘이라면 그 길에서 히치하이킹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을 겁니다. 그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배고픔과 함께. 바보스러움과 함께.”
그것은 그들의 마지막 작별 인사였습니다. 배고픔과 함께. 바보스러움과 함께. 늘 제 자신이 그러기를 소망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새출발을 위해 졸업을 하고, 저는 여러분께 똑같은 소망을 보냅니다.
배고픔과 함께. 바보스러움과 함께.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연설문 마침―-
스타워즈는 전세계적으로 원체 많은 팬을 지닌 터라 관련 기획상품들이 수없이 많다.
특히 이번 에피소드의 경우 다스베이더의 비중이 워낙에 높은지라 그와 관련된 아이템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 다스베이더 가면은 중국에서 OEM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루카스 필름의 공식 라이센스 제품이다.
이 가면의 특징은 실물처럼 투구와 가면 부분이 서로 분리될 뿐만 아니라 아랫쪽에 별도의 사운드 박스가 달려있어서 세개의 버튼을 통해 다양한 사운드 효과가 재생된다는 점이다.
MOD1. 숨소리 모드이다.
다스베이더 특유의 "슈욱~슈우욱~"하는 숨소리가 흘러나온다.
MOD2. 대사 모드다. 다스베이더의 유명한 명대사 세 종이 버튼을 누를때마다 '제임스 얼 존스(다스베이더의 목소리 연기자)'의 원래 음성 그대로 나온다.
"You Don't Know The Power Of Dark Side!"
MOD3. 목소리 변조 모드이다.
가면 안에 내장된 마이크 덕분에 착용자가 말을 하고 숨을 쉬면 그게 그대로 다스베이더의 목소리로 변조되어 나온다.
그래서인지 다스베이더의 대사중 가장 유명한 "내가 니 애비다!"는 재생목록에 없다.
스스로 해보란 이야기인가?
가면 자체는 중화 인민들의 피눈물 덕분에 이베이등지에서 불과 45불 정도밖에 안한다.
하나쯤 갖고 싶지 않으신지?
많이 처분한다고 했는데...
모아놓은 군복들이 산을 이룬 것 처럼 보인다.
아직 많이 처분하긴 해야 하지만, 여기 보이는 것들은 평생 가지고 갈 것들의 일부.
모아놓은 군복들이 산을 이룬 것 처럼 보인다.
아직 많이 처분하긴 해야 하지만, 여기 보이는 것들은 평생 가지고 갈 것들의 일부.
얼마 안있으면 한국전쟁 발발일인 6.25가 돌아온다.
예전에는 각종 반공교육 영향으로 6.25는 글짓기랑 반공 포스터를 그리는 날이었지만, 요즘은 그저 TV에서 전쟁영화 해주는 날 정도로 생각되고 있는 것같다.
우리땅에서 일어난 일인데 의외로 그 자취들이 잘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
전국에 수없이 많은 반공기념관이나 한국전쟁 관련 전시관들이 있지만 전시된 유물들의 내용이나 수준은 극히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생각이 난 김에 모아놓은 몇가지 한국전쟁 관련 수집품들중 각종 기장류들.
한국군의 계급장들과 병과마크, 부대마크와 모표등이다.
이중 대부분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소품제작에 활용되거나 직접 출연했던 녀석들이 많다.
요건 한국전쟁과는 관련이 별로 없지만 아끼는 부대마크및 각종 기장들.
개인적으로는 기계가 아닌 핸드메이드로 만들어진 뷸리온(bullion)방식의 패치(위 사진에서 모표나 미8군 부대마크, 아래 사진의 오른쪽에 있는 패치들이 이 방식으로 제작된 것)들을 참 좋아 한다.
예전에는 각종 반공교육 영향으로 6.25는 글짓기랑 반공 포스터를 그리는 날이었지만, 요즘은 그저 TV에서 전쟁영화 해주는 날 정도로 생각되고 있는 것같다.
우리땅에서 일어난 일인데 의외로 그 자취들이 잘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
전국에 수없이 많은 반공기념관이나 한국전쟁 관련 전시관들이 있지만 전시된 유물들의 내용이나 수준은 극히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생각이 난 김에 모아놓은 몇가지 한국전쟁 관련 수집품들중 각종 기장류들.
한국군의 계급장들과 병과마크, 부대마크와 모표등이다.
이중 대부분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소품제작에 활용되거나 직접 출연했던 녀석들이 많다.
요건 한국전쟁과는 관련이 별로 없지만 아끼는 부대마크및 각종 기장들.
개인적으로는 기계가 아닌 핸드메이드로 만들어진 뷸리온(bullion)방식의 패치(위 사진에서 모표나 미8군 부대마크, 아래 사진의 오른쪽에 있는 패치들이 이 방식으로 제작된 것)들을 참 좋아 한다.
자동차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형 만들던 가락과 예전에 모터싸이클 선수시절의 기억만으로 무작정 달려들어 만들었던 내 애마가 이제 삼년이 다 되었다.
내 손길을 거친지 삼년이란 이야기지, 실제 나이는 이제 15살이 넘은 1990년식.
재탄생 했을대는 깨끗했지만, 그 사이에 이런저런 차들에게 무수히 들이 받힌 탓에 여기 저기 영광의 상처가 많이 생겨 버렸다.
(왜 그렇게들 와서 들이 받는지 원~ 물론 내차가 가벼운 흠집이 나거나 살짝 찌그러진 것에 비해 사고를 낸 차는 처참하게 부서졌지만...)
조만간 이녀석의 2차 수술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나마 자동차로써는 이제 황혼기에 접에든 이 녀석이 아직까지는 큰 고장없이 잘 달려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인건님이 찍어주신 사진입니다)
내 손길을 거친지 삼년이란 이야기지, 실제 나이는 이제 15살이 넘은 1990년식.
재탄생 했을대는 깨끗했지만, 그 사이에 이런저런 차들에게 무수히 들이 받힌 탓에 여기 저기 영광의 상처가 많이 생겨 버렸다.
(왜 그렇게들 와서 들이 받는지 원~ 물론 내차가 가벼운 흠집이 나거나 살짝 찌그러진 것에 비해 사고를 낸 차는 처참하게 부서졌지만...)
조만간 이녀석의 2차 수술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나마 자동차로써는 이제 황혼기에 접에든 이 녀석이 아직까지는 큰 고장없이 잘 달려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인건님이 찍어주신 사진입니다)
탱크, 비행기, 로보트, 인형등 장르를 굳이 가리지 않고 모형을 만드는 편이지만, 역시 일로 만드는 것과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드는 것은 차이가 있는 법.
예전부터 나의 가장 큰 관심사이자 만들고 싶은 모형은 우리 전통과 역사를 소재로 한 인형과 디오라마 작품이다.
그래서 과거 취미가 시절에는 [역사인물기행]이라던가 [비천]같은 코너를 연재하곤 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인형 분야는 인기가 많지 않아 연재를 오래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최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덕에 우리 전통 무사들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 같아 새롭게 연재를 시작할 예정이다.
이때문에 그동안 모은 자료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일본에 취재까지 다녀왔는데, 요즘 이 [조선전역해전도]를 구석구석 살펴보고 있다.
이 그림을 만나기 전부터 가장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 1/35스케일로 판옥선의 해전을 디오라마로 재현하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 엄청난 작업양보다는 1/35스케일로 재현할 경우 판옥선의 크기가 무려 93Cm나 된다는 것.
거기에 일본의 세키부네 한척 정도가 들어가면 디오라마는 웬만한 책상보다 더 큰 베이스가 필요해 진다.
그대로 진행할 것인가, 아니면 부분을 재현하는 방법으로 방향을 틀 것인가... 고민중이다
예전부터 나의 가장 큰 관심사이자 만들고 싶은 모형은 우리 전통과 역사를 소재로 한 인형과 디오라마 작품이다.
그래서 과거 취미가 시절에는 [역사인물기행]이라던가 [비천]같은 코너를 연재하곤 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인형 분야는 인기가 많지 않아 연재를 오래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최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덕에 우리 전통 무사들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 같아 새롭게 연재를 시작할 예정이다.
이때문에 그동안 모은 자료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일본에 취재까지 다녀왔는데, 요즘 이 [조선전역해전도]를 구석구석 살펴보고 있다.
이 그림을 만나기 전부터 가장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 1/35스케일로 판옥선의 해전을 디오라마로 재현하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 엄청난 작업양보다는 1/35스케일로 재현할 경우 판옥선의 크기가 무려 93Cm나 된다는 것.
거기에 일본의 세키부네 한척 정도가 들어가면 디오라마는 웬만한 책상보다 더 큰 베이스가 필요해 진다.
그대로 진행할 것인가, 아니면 부분을 재현하는 방법으로 방향을 틀 것인가... 고민중이다
지난달에는 탱크, 이번에는 비행기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만든 비행기 모형이 아카데미 1/32 호넷이었으니 연이어 아카데미 1/32스케일 키트를 만든 셈.
일부러 그런건 아닌데, 이상스레 1/32 스케일은 항상 내차지가 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만든 비행기 모형이 아카데미 1/32 호넷이었으니 연이어 아카데미 1/32스케일 키트를 만든 셈.
일부러 그런건 아닌데, 이상스레 1/32 스케일은 항상 내차지가 되는 것 같다.
얼마전 인터넷상에서 일본에 있다는 [조선역해전도]라는 그림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순신 통제사와 일본수군 구루시마 해적간의 전투를 그린 이 그림은 그 치밀한 묘사로 인해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비교의 대상이 되며 화제가 되었다.
나 역시 이미 오래전부터 거북배와 이순신에 관해 보통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였고, 그런 내가 보기에도 이 그림이 보통 그림이 아니라는 판단에 이 작품의 정체에 대해 추적에 들어갔다.
인터넷에서 얻은 단편적인 기초정보를 가지고 한국과 일본에 수소문한지 이틀째, 마침내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는 일본의 아오키 화랑(일본에는 같은 이름의 화랑이 무지 많았다)과 전화로 통화한 뒤 곧바로 일본으로 날아갔던 지난 토요일(5월 14일), 마침내 이 그림을 직접 만지고 볼 수 있었다.
인터넷 상에서 떠도는 수많은 소문과 논란은 이번 취재를 통해 아마도 깨끗하게 정리될 것같다.
작품의 정확한 이름은 [조선전역해전도]이며, 일본측은 구루지마 해적(수군), 아군의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수군이다.
가운데의 대형 전선(판옥선)이 과연 이통제의 좌선(기함)인가는 그림을 좀더 면밀하게 판독해야 확실하겠지만, 일단은 전라좌수영 좌선으로 판단되며 그림의 왼쪽 상단에 있는 통제영 거북배의 기치에는 전라좌수영 산하의 거북배라는 명문이 또렷했다.
그림을 그린 화가는 지금은 작고한 [오오타 텐요오]라는 유명한 일본의 역사화가로써, 이 그림 자체는 1940년 전후로 그려진 것이다.
이 그림이 이토록 정밀할 수 있는 것은 이 작가 자신이 뛰어난 역사전문가이었던 데다가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은 일본측의 조선수군과 조선 선박에 대한 연구자료를 토대로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한말까지도 조선에는 전선(판옥선)이 일부 방치되어 남아있었는데, 이를 최초로 학술적으로 연구한 것은 일본인들이었고, 그 자료는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을뿐만 아니라 아직 제대로 공개되고 있지 않은 자료가 많다.
과거 일본 제국 해군은 이순신 장군을 거의 신격화해서 숭배하는 전통이 있는데, 그 정점에는 일본 해군 최고의 영웅인 도고 제독이 있다.(올해가 그의 기념비적인 러일해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도고 제독은 생전에 공공연히 자신은 이순신 제독의 발가락 끝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공언했고, 러시아 흑해함대와의 전투를 앞두고 이순신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을뿐만 아니라 실제 전투에 들어가서는 이순신의 학익진 전법을 그대로 사용해 대승을 거둔 장본인이다.
공식적인 이 그림에 대한 정보에는 없지만, 그림의 소장자인 아오키씨께서 들려주신 비공식적인 정보로는 이 그림이 일본 해군의 의뢰하에 그려진 것같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가 이 그림을 소장하기 전에 원래 이 그림은 2차 대전중 일본 해군의 수교사(해군 장교 집합소)에 걸려있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과 그림 세부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은 [멀티매니아 호비스트]의 군사전문잡지 월간 플래툰(PLATOON) 7월호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이순신 통제사와 일본수군 구루시마 해적간의 전투를 그린 이 그림은 그 치밀한 묘사로 인해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비교의 대상이 되며 화제가 되었다.
나 역시 이미 오래전부터 거북배와 이순신에 관해 보통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였고, 그런 내가 보기에도 이 그림이 보통 그림이 아니라는 판단에 이 작품의 정체에 대해 추적에 들어갔다.
인터넷에서 얻은 단편적인 기초정보를 가지고 한국과 일본에 수소문한지 이틀째, 마침내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는 일본의 아오키 화랑(일본에는 같은 이름의 화랑이 무지 많았다)과 전화로 통화한 뒤 곧바로 일본으로 날아갔던 지난 토요일(5월 14일), 마침내 이 그림을 직접 만지고 볼 수 있었다.
인터넷 상에서 떠도는 수많은 소문과 논란은 이번 취재를 통해 아마도 깨끗하게 정리될 것같다.
작품의 정확한 이름은 [조선전역해전도]이며, 일본측은 구루지마 해적(수군), 아군의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수군이다.
가운데의 대형 전선(판옥선)이 과연 이통제의 좌선(기함)인가는 그림을 좀더 면밀하게 판독해야 확실하겠지만, 일단은 전라좌수영 좌선으로 판단되며 그림의 왼쪽 상단에 있는 통제영 거북배의 기치에는 전라좌수영 산하의 거북배라는 명문이 또렷했다.
그림을 그린 화가는 지금은 작고한 [오오타 텐요오]라는 유명한 일본의 역사화가로써, 이 그림 자체는 1940년 전후로 그려진 것이다.
이 그림이 이토록 정밀할 수 있는 것은 이 작가 자신이 뛰어난 역사전문가이었던 데다가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은 일본측의 조선수군과 조선 선박에 대한 연구자료를 토대로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한말까지도 조선에는 전선(판옥선)이 일부 방치되어 남아있었는데, 이를 최초로 학술적으로 연구한 것은 일본인들이었고, 그 자료는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을뿐만 아니라 아직 제대로 공개되고 있지 않은 자료가 많다.
과거 일본 제국 해군은 이순신 장군을 거의 신격화해서 숭배하는 전통이 있는데, 그 정점에는 일본 해군 최고의 영웅인 도고 제독이 있다.(올해가 그의 기념비적인 러일해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도고 제독은 생전에 공공연히 자신은 이순신 제독의 발가락 끝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공언했고, 러시아 흑해함대와의 전투를 앞두고 이순신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을뿐만 아니라 실제 전투에 들어가서는 이순신의 학익진 전법을 그대로 사용해 대승을 거둔 장본인이다.
공식적인 이 그림에 대한 정보에는 없지만, 그림의 소장자인 아오키씨께서 들려주신 비공식적인 정보로는 이 그림이 일본 해군의 의뢰하에 그려진 것같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가 이 그림을 소장하기 전에 원래 이 그림은 2차 대전중 일본 해군의 수교사(해군 장교 집합소)에 걸려있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과 그림 세부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은 [멀티매니아 호비스트]의 군사전문잡지 월간 플래툰(PLATOON) 7월호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드디어 스타워즈의 모든 요소가 결합된 마지막 스타워즈 에피소드의 본격 트레일러가 공개!
함대전투와 함께 이번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다스베이더다.
과연 루카스의 말대로 가장 스타워즈 답고 스타워즈의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영화가 될지... 올여름 가장 기대되는 영화중 하나.
함대전투와 함께 이번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다스베이더다.
과연 루카스의 말대로 가장 스타워즈 답고 스타워즈의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영화가 될지... 올여름 가장 기대되는 영화중 하나.
[취미]디오라마 ''미니 나라''로 오세요
[세계일보 2005-03-31 17:06]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다 싶을 정도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디오라마(Diorama)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전투 장면 등을 축소해서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박물관 등에서 본 전투 장면 축소모형도 디오라마의 한 예다. 자신이 관심 있는 장면은 어느 것이든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 디오라마만의 매력이다. 예술 작품을 떠올릴 정도로 정교하고 수준 높은 디오라마는 상당한 노력과 열정을 필요로 하지만,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은 그 노력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SBS 드라마 ‘봄날’을 통해서도 소개됐던 디오라마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창조성은 필수=머릿속 장면을 구체적으로 재현해 내는 것이기 때문에 구성력이 없어서는 안 된다. 외국에서 디오라마가 종합예술로 불리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세부적인 묘사도 중요하지만, 전체 구성이 조화를 이루며 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디오라마는 근대 이후 서양에서 테이블 위에 인형들을 올려놓고 역사적인 전투 장면 등을 재현해 놓은 데서 유래한 만큼 역사적 지식이 필수적이다.
이와 함께 세밀하게 재현하려면 당시 사물에 대한 관찰력도 따라야 한다. 이처럼 디오라마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역사에 대한 관심이나 관찰력이 높아지게 된다. 표현 기술은 주변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배경지식은 역사책을 통해 공부해야 한다. 세부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관찰력을 기르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문 ‘프라모델러(Plastic+model+finisher)’이자 모형전문잡지 ‘네오’의 편집장인 김세랑(32)씨는 “디오라마에는 사용하는 재료에 대한 지식, 만들어내는 손재주, 도료 작업에서의 미적 감각, 구성력 등이 종합적으로 필요하다”며 “구성력을 통해 결정적으로 달라진다”고 말했다.
◆재료 준비도 자유=디오라마를 만들려면 단품 프라모델이 우선 필요하다. 시중에서 1만∼2만원 대에 살 수 있는 프라모델을 제작해 도료를 바르면 단품은 완성된다. 그다음부터 디오라마의 창의성이 시작된다. 단품으로 살 수 있는 인형, 탱크, 자동차 등을 제외하고 건물 등을 어떻게 배치하고 무슨 색을 칠할지, 땅과 산 들은 어떤 모습으로 만들지를 제작자가 창안해 내는 것이다.
디오라마의 가장 큰 특징인 창조성은 제작할 때의 다양한 응용 가능성과도 맞닿아 있다. ‘베이스’(인형과 차량, 지형을 배치하는 받침)는 그림으로 치면 도화지에 해당한다. 베이스로는 액자가 많이 활용된다. 구하기도 쉽고 기본 모양인 사각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액자 이외에도 주변 목공소에서 구한 나무판이나 작은 CD 케이스도 가능하다.
디오라마 제작 경험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무엇으로 하는지는 자유다. 어떤 재료를 쓰든지 실물처럼 표현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넓고 평평한 바닥만 있으면 ‘베이스’를 만들 수 있다. 산을 표현할 때 지점토, 스티로폼, 석고, 폐지 등 재료감은 주변에 널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흙이나 풀을 표현할 때도 ‘어떤 재료든 자유’다.
◆과욕은 금물=디오라마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기차가 움직이고 철도 신호체계, 자연 환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라면 제작기간 수개월에 비용도 수백만원이 들어간다. 입문자에게 이는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다.
김세랑 편집장은 “처음에는 자신의 실력에 맞도록 간단하고 쉬운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며 “물이나 풀이 있는 장면을 처음부터 시도하려는 것은 무리”라고 조언했다. 그는 또 “처음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오지 않더라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안두원 기자 flyhig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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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모형관련 기사가 신문에 나는 것은 좋은데 기사를 풀빵찍듯이 인스턴트로 급조하는 것은 항상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다.
꼭 다른 매체등에서 이슈화 되고나면 너도 나도 달려드는 저급한 벌떼 저널리즘도 불만이고...
하지만 모형제작이라는 취미를 조금이라도 알릴 수 있을까 해서 매번 인터뷰에 응하긴 하지만, 정말로 진지하게 모형제작이라는 세계를 바라보고자 인터뷰를 청해오는 기자를 만나고 싶다,
제발 인터뷰 하러 와서 "이 장난감은 얼마냐"고 묻지 좀 말라고요!
[세계일보 2005-03-31 17:06]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다 싶을 정도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디오라마(Diorama)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전투 장면 등을 축소해서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박물관 등에서 본 전투 장면 축소모형도 디오라마의 한 예다. 자신이 관심 있는 장면은 어느 것이든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 디오라마만의 매력이다. 예술 작품을 떠올릴 정도로 정교하고 수준 높은 디오라마는 상당한 노력과 열정을 필요로 하지만,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은 그 노력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SBS 드라마 ‘봄날’을 통해서도 소개됐던 디오라마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창조성은 필수=머릿속 장면을 구체적으로 재현해 내는 것이기 때문에 구성력이 없어서는 안 된다. 외국에서 디오라마가 종합예술로 불리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세부적인 묘사도 중요하지만, 전체 구성이 조화를 이루며 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디오라마는 근대 이후 서양에서 테이블 위에 인형들을 올려놓고 역사적인 전투 장면 등을 재현해 놓은 데서 유래한 만큼 역사적 지식이 필수적이다.
이와 함께 세밀하게 재현하려면 당시 사물에 대한 관찰력도 따라야 한다. 이처럼 디오라마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역사에 대한 관심이나 관찰력이 높아지게 된다. 표현 기술은 주변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배경지식은 역사책을 통해 공부해야 한다. 세부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관찰력을 기르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문 ‘프라모델러(Plastic+model+finisher)’이자 모형전문잡지 ‘네오’의 편집장인 김세랑(32)씨는 “디오라마에는 사용하는 재료에 대한 지식, 만들어내는 손재주, 도료 작업에서의 미적 감각, 구성력 등이 종합적으로 필요하다”며 “구성력을 통해 결정적으로 달라진다”고 말했다.
◆재료 준비도 자유=디오라마를 만들려면 단품 프라모델이 우선 필요하다. 시중에서 1만∼2만원 대에 살 수 있는 프라모델을 제작해 도료를 바르면 단품은 완성된다. 그다음부터 디오라마의 창의성이 시작된다. 단품으로 살 수 있는 인형, 탱크, 자동차 등을 제외하고 건물 등을 어떻게 배치하고 무슨 색을 칠할지, 땅과 산 들은 어떤 모습으로 만들지를 제작자가 창안해 내는 것이다.
디오라마의 가장 큰 특징인 창조성은 제작할 때의 다양한 응용 가능성과도 맞닿아 있다. ‘베이스’(인형과 차량, 지형을 배치하는 받침)는 그림으로 치면 도화지에 해당한다. 베이스로는 액자가 많이 활용된다. 구하기도 쉽고 기본 모양인 사각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액자 이외에도 주변 목공소에서 구한 나무판이나 작은 CD 케이스도 가능하다.
디오라마 제작 경험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무엇으로 하는지는 자유다. 어떤 재료를 쓰든지 실물처럼 표현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넓고 평평한 바닥만 있으면 ‘베이스’를 만들 수 있다. 산을 표현할 때 지점토, 스티로폼, 석고, 폐지 등 재료감은 주변에 널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흙이나 풀을 표현할 때도 ‘어떤 재료든 자유’다.
◆과욕은 금물=디오라마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기차가 움직이고 철도 신호체계, 자연 환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라면 제작기간 수개월에 비용도 수백만원이 들어간다. 입문자에게 이는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다.
김세랑 편집장은 “처음에는 자신의 실력에 맞도록 간단하고 쉬운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며 “물이나 풀이 있는 장면을 처음부터 시도하려는 것은 무리”라고 조언했다. 그는 또 “처음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오지 않더라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안두원 기자 flyhig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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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모형관련 기사가 신문에 나는 것은 좋은데 기사를 풀빵찍듯이 인스턴트로 급조하는 것은 항상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다.
꼭 다른 매체등에서 이슈화 되고나면 너도 나도 달려드는 저급한 벌떼 저널리즘도 불만이고...
하지만 모형제작이라는 취미를 조금이라도 알릴 수 있을까 해서 매번 인터뷰에 응하긴 하지만, 정말로 진지하게 모형제작이라는 세계를 바라보고자 인터뷰를 청해오는 기자를 만나고 싶다,
제발 인터뷰 하러 와서 "이 장난감은 얼마냐"고 묻지 좀 말라고요!
트레일러 사이트를 보다가 발견한 영화 한 편.
과연 한국에서 개봉이 이뤄질지는 미지수지만, 예고편만으로도 눈길이 가는 영화다.
영화의 오피셜 사이트는 이곳이다.
http://www.gunnerpalace.com/
과연 한국에서 개봉이 이뤄질지는 미지수지만, 예고편만으로도 눈길이 가는 영화다.
영화의 오피셜 사이트는 이곳이다.
http://www.gunnerpalace.com/
지난 석달간 고민하던 '큰 놈'의 완성.
징글징글 하더니만 결국 끝이 나긴 났다.
어른 팔뚝만한 이놈을 색칠하느라 내 팔뚝이 너무 아팠지만,
언제나 완성의 기쁨은 크게 마련이고 특히 이번 녀석은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더욱 완성이 반갑다.
징글징글 하더니만 결국 끝이 나긴 났다.
어른 팔뚝만한 이놈을 색칠하느라 내 팔뚝이 너무 아팠지만,
언제나 완성의 기쁨은 크게 마련이고 특히 이번 녀석은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더욱 완성이 반갑다.
영문단어를 타이핑 하고나면 그 단어를 그림으로 만들어 주는 재미나는 사이트 발견!
내 이름을 쳐봤더니 이렇게 만들어 준다^^
도전해 보고 싶은 분들은 아래 주소로!
http://metaatem.net/words.php
내 이름을 쳐봤더니 이렇게 만들어 준다^^
도전해 보고 싶은 분들은 아래 주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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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글에서 고민하던 결과물중 하나...
작은 놈은 일단 시작을 하니 나름대로 시도해 본 의도가 맞아 떨어졌고... 이젠 큰놈이 문제다
모형을 만든다는 것.
요즘 처럼 어렵다고 느낀 적이 없었던 것같다.
그동안 스스로를 많이 채찍질하며 달려왔고, 중간에 슬럼프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잘 넘어 왔는데, 요즘 처럼 모형제작이 어렵게 느껴진 적이 없는 것같다.
붓을 드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
'기법'은 다 알지만, 테크닉을 사용하는 것과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또 한번 실감하는 순간.
눈 앞에 놓은 두 점의 미완성 작품을 보며 어디로 가야할지를 고민하는 순간이다.
이 과정을 넘지 않고는 앞으로는 모형을 만들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아가지 않는 손을 부지런히 놀려 보는 것 외에는 답이 없겠지.
하아~~
무언가를 만들어 낸 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요즘 처럼 어렵다고 느낀 적이 없었던 것같다.
그동안 스스로를 많이 채찍질하며 달려왔고, 중간에 슬럼프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잘 넘어 왔는데, 요즘 처럼 모형제작이 어렵게 느껴진 적이 없는 것같다.
붓을 드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
'기법'은 다 알지만, 테크닉을 사용하는 것과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또 한번 실감하는 순간.
눈 앞에 놓은 두 점의 미완성 작품을 보며 어디로 가야할지를 고민하는 순간이다.
이 과정을 넘지 않고는 앞으로는 모형을 만들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아가지 않는 손을 부지런히 놀려 보는 것 외에는 답이 없겠지.
하아~~
무언가를 만들어 낸 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잡지 마감에 허덕이고 있던 며칠전...
비몽사몽간에 작업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라디오의 작은 소리.
갔단다 그녀가...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나하고는 별다른 상관없는 일 이지만...
이후 들려오는 온갖 소문과 기사에 등장하는 사생활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지만...
그녀가 출연한 영화에서 같이 일을 했기에 잠시 멍~해지고 기분이 이상했다.
태극기 휘날리며 제작발표회장에서의 이은주씨.
발표회 당시 그녀와 나의 거리는 불과 2미터.
이후로도 의상 피팅이나 관련 자리에서도 몇번 봤었는데...
어딘가 그늘이 보이는 얼굴이라 처음봤을때 아직 어리지만 나중에 굴곡있는 역할도 맡을 만한 여배우겠다 싶었는데, 그래서 여배우로써 꽤 오래가지 않을까 했는데...
이런저런 것 다 떠나서 그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는 일이 안타깝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이런 비슷한 느낌을 또 가진적이 있다 싶어 생각해 보니...
김광석씨가 죽기 불과 얼마전,
당시 대학로에 살던 난 그때도 잡지 마감을 하고 새벽에 귀가를 하던 중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던 날이었는데, 술 한잔 생각이 간절해 포장마차에서 두꺼비 한마리 잡고 새벽에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다 마주친 그...
부슬비에 머리가 다 젖은 채 나랑 같은 쐬주 냄새 풍기며 예의 그 주름가득한 웃음을 짓던 사람.
내가 말을 건다.
"어디 가세요? 한잔 하신 모양이네"
"네~에~~ 후배랑 기분좋게 한잔 했죠~ 같이 한잔 더 할래요?"
왜 그랬는지 난 그저 인사하고 다시 가던길을 갔지만, 등골시리는 빗속에서 좌우로 춤추듯 흔들 거리며 걸어가던 뒷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상하지?
왜 내가 알거나 만난 연예인들은 스스로 떠나는 걸까?
비몽사몽간에 작업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라디오의 작은 소리.
갔단다 그녀가...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나하고는 별다른 상관없는 일 이지만...
이후 들려오는 온갖 소문과 기사에 등장하는 사생활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지만...
그녀가 출연한 영화에서 같이 일을 했기에 잠시 멍~해지고 기분이 이상했다.
태극기 휘날리며 제작발표회장에서의 이은주씨.
발표회 당시 그녀와 나의 거리는 불과 2미터.
이후로도 의상 피팅이나 관련 자리에서도 몇번 봤었는데...
어딘가 그늘이 보이는 얼굴이라 처음봤을때 아직 어리지만 나중에 굴곡있는 역할도 맡을 만한 여배우겠다 싶었는데, 그래서 여배우로써 꽤 오래가지 않을까 했는데...
이런저런 것 다 떠나서 그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는 일이 안타깝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이런 비슷한 느낌을 또 가진적이 있다 싶어 생각해 보니...
김광석씨가 죽기 불과 얼마전,
당시 대학로에 살던 난 그때도 잡지 마감을 하고 새벽에 귀가를 하던 중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던 날이었는데, 술 한잔 생각이 간절해 포장마차에서 두꺼비 한마리 잡고 새벽에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다 마주친 그...
부슬비에 머리가 다 젖은 채 나랑 같은 쐬주 냄새 풍기며 예의 그 주름가득한 웃음을 짓던 사람.
내가 말을 건다.
"어디 가세요? 한잔 하신 모양이네"
"네~에~~ 후배랑 기분좋게 한잔 했죠~ 같이 한잔 더 할래요?"
왜 그랬는지 난 그저 인사하고 다시 가던길을 갔지만, 등골시리는 빗속에서 좌우로 춤추듯 흔들 거리며 걸어가던 뒷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상하지?
왜 내가 알거나 만난 연예인들은 스스로 떠나는 걸까?
블랙큐브 프로젝트 4탄- 소넷 1기가 CPU & 라데온8500 장착
안녕하세요? 세랑입니다.
오랜만에 잊혀졌던 글타래인 블랙큐브 업그레이드를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그동안 잘 사용하고 있었던 제 블랙큐브는 라데온7000으로 이미 한번 업그레이드 된 것이었으나, 아주 우연한 기회에 한단계 윗사양인 라데온8500 맥에디션 그래픽 카드와 소넷에서 나온 1G CPU를 좋은 조건으로 입수하게 되어 업그레이드를 결정하게 되었다.
1. 일단 케이스를 벗긴뒤 기존의 카드를 빼고 새로운 라데온8500을 끼워 위치를 잡아 보고 기본적으로 인식이 가능한지 테스트 합니다.
기존 카드에 비해 너무나 넓어서 그래픽 카드가 큐브의 전원관리를 맡아주는 파워 보드를 꼽을 자리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때문에 기존에 라데온8500을 큐브에 이식하는 예가 거의 없었던 것이죠.
2.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파워 보드를 다른 곳으로 보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코넥터 사이를 길게 이어줄 연장 케이블이 필요합니다.
기존의 코넥터로는 맞는 모양을 찾지 못해서 일단 일반적인 30핀 커넥터로 만든 케이블을 만들고 커넥터 형태를 자르고 깍아서 큐브에 맞췄습니다.
일단 이것이 되지 않는다면 라데온8500을 장착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3. 라데온 8500 맥에디션입니다.
테스트를 위해 임시로 브라켓을 빼놓았고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큐브에 집어 넣기 위해 모서리를 일부 가공했습니다.
4. 라데온 8500 맥에디션은 DVI, VGA, S-Video 단자를 지원합니다.
5. 카드는 PCI 타잎으로 되어 있기때문에 브라켓을 가공하지 않고서는 큐브에 고정을 못합니다. 일단 양옆을 잘라내는데, 큐브의 안쪽 공간에 맞춘 것입니다.
6. 브라켓의 폭이 넓어서 윗쪽을 톱으로 좀 썰어 내야 합니다.
바이스에 물려 놓고 쇠톱으로 자릅니다.
7. S-Video 단자 옆쪽에 외부 고정 나사가 들어갈 구엉을 손드릴로 뚫어 준뒤 결합.
8. 이제 큐브를 완전 분해 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전원 보드를 이어줄 케이블의 설치와 CPU 교체를 위해서 입니다.
9. CPU교체를 완료한 메인 보드입니다.
실제 CPU는 이 보드의 아랫쪽에 있죠. 연장 케이블을 꼽기위해 원래의 파워 보드를 꼽는 마운트를 약간 개조했습니다.(맨위 오른쪽의 흰색부분)
10. 케이블을 꼽고 비좁은 내부공간의 효율성과 냉각을 고려해 케이블이 지나가는 자리를 결정합니다.
11. 기존의 전원보드를 고정하기 위한 장치로 클립을 구부려 간단한 마운트를 만듭니다.
이건 외국의 한 유저가 큐브를 개조하는 제작기에서 본 Tip입니다^^
12. 들어갈 공간은 하드 디스크와 슬롯 로딩 드라이브 사이의 공간입니다.
13. 아랫쪽 역시 클립과 볼트와 너트를 이용해 고정합니다.
14. 고정을 마친 상태입니다.
뒷쪽에 검정색 테이브를 바른 것은 자칫 부품이 닿아서 쇼트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절연 테이브를 바른 것입니다.
15. 부품들이 다른 부분에 닿으면 안되기 때문에 적정 공간을 유지해야 합니다.
16. 그대로 장착하면 그래픽 카드의 윗쪽 모서리가 큐브의 윗덥개에 닿아 덥개를 닫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카드의 모서리 일부를 잘라낸뒤 곱게 갈아내고 절연처리를 해야 했습니다.
17. 자, 이제 재조립이 완료 되고 드디어 부팅의 순간입니다.
18. 그래픽 카드가 차지하는 면적이 얼마나 큰지를 볼 수 있습니다.
DVI로 씨네마 디스플레이를 연결해 봐야 하는데, 그러려먼 집으로 가야 해서 일단은 VGA모니터로 테스트 합니다.
19. 부팅 성공입니다.
모니터 설정창에서 지원 해상도가 1900대로 올라가는데, 정작 모니터가 못받춰 줘서 일단 1280 X 1024까지 되는군요.
20. 블랙 큐브의 동생뻘인 블랙 아이 스피커, U2 iPod과와 함께...
21. 맥 정보창입니다. 1기가 프로세서에 1.25기가 램...
22. 그래픽 카드도 잘 인식하는군요^^
안녕하세요? 세랑입니다.
오랜만에 잊혀졌던 글타래인 블랙큐브 업그레이드를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그동안 잘 사용하고 있었던 제 블랙큐브는 라데온7000으로 이미 한번 업그레이드 된 것이었으나, 아주 우연한 기회에 한단계 윗사양인 라데온8500 맥에디션 그래픽 카드와 소넷에서 나온 1G CPU를 좋은 조건으로 입수하게 되어 업그레이드를 결정하게 되었다.
1. 일단 케이스를 벗긴뒤 기존의 카드를 빼고 새로운 라데온8500을 끼워 위치를 잡아 보고 기본적으로 인식이 가능한지 테스트 합니다.
기존 카드에 비해 너무나 넓어서 그래픽 카드가 큐브의 전원관리를 맡아주는 파워 보드를 꼽을 자리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때문에 기존에 라데온8500을 큐브에 이식하는 예가 거의 없었던 것이죠.
2.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파워 보드를 다른 곳으로 보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코넥터 사이를 길게 이어줄 연장 케이블이 필요합니다.
기존의 코넥터로는 맞는 모양을 찾지 못해서 일단 일반적인 30핀 커넥터로 만든 케이블을 만들고 커넥터 형태를 자르고 깍아서 큐브에 맞췄습니다.
일단 이것이 되지 않는다면 라데온8500을 장착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3. 라데온 8500 맥에디션입니다.
테스트를 위해 임시로 브라켓을 빼놓았고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큐브에 집어 넣기 위해 모서리를 일부 가공했습니다.
4. 라데온 8500 맥에디션은 DVI, VGA, S-Video 단자를 지원합니다.
5. 카드는 PCI 타잎으로 되어 있기때문에 브라켓을 가공하지 않고서는 큐브에 고정을 못합니다. 일단 양옆을 잘라내는데, 큐브의 안쪽 공간에 맞춘 것입니다.
6. 브라켓의 폭이 넓어서 윗쪽을 톱으로 좀 썰어 내야 합니다.
바이스에 물려 놓고 쇠톱으로 자릅니다.
7. S-Video 단자 옆쪽에 외부 고정 나사가 들어갈 구엉을 손드릴로 뚫어 준뒤 결합.
8. 이제 큐브를 완전 분해 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전원 보드를 이어줄 케이블의 설치와 CPU 교체를 위해서 입니다.
9. CPU교체를 완료한 메인 보드입니다.
실제 CPU는 이 보드의 아랫쪽에 있죠. 연장 케이블을 꼽기위해 원래의 파워 보드를 꼽는 마운트를 약간 개조했습니다.(맨위 오른쪽의 흰색부분)
10. 케이블을 꼽고 비좁은 내부공간의 효율성과 냉각을 고려해 케이블이 지나가는 자리를 결정합니다.
11. 기존의 전원보드를 고정하기 위한 장치로 클립을 구부려 간단한 마운트를 만듭니다.
이건 외국의 한 유저가 큐브를 개조하는 제작기에서 본 Tip입니다^^
12. 들어갈 공간은 하드 디스크와 슬롯 로딩 드라이브 사이의 공간입니다.
13. 아랫쪽 역시 클립과 볼트와 너트를 이용해 고정합니다.
14. 고정을 마친 상태입니다.
뒷쪽에 검정색 테이브를 바른 것은 자칫 부품이 닿아서 쇼트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절연 테이브를 바른 것입니다.
15. 부품들이 다른 부분에 닿으면 안되기 때문에 적정 공간을 유지해야 합니다.
16. 그대로 장착하면 그래픽 카드의 윗쪽 모서리가 큐브의 윗덥개에 닿아 덥개를 닫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카드의 모서리 일부를 잘라낸뒤 곱게 갈아내고 절연처리를 해야 했습니다.
17. 자, 이제 재조립이 완료 되고 드디어 부팅의 순간입니다.
18. 그래픽 카드가 차지하는 면적이 얼마나 큰지를 볼 수 있습니다.
DVI로 씨네마 디스플레이를 연결해 봐야 하는데, 그러려먼 집으로 가야 해서 일단은 VGA모니터로 테스트 합니다.
19. 부팅 성공입니다.
모니터 설정창에서 지원 해상도가 1900대로 올라가는데, 정작 모니터가 못받춰 줘서 일단 1280 X 1024까지 되는군요.
20. 블랙 큐브의 동생뻘인 블랙 아이 스피커, U2 iPod과와 함께...
21. 맥 정보창입니다. 1기가 프로세서에 1.25기가 램...
22. 그래픽 카드도 잘 인식하는군요^^
예전에는 몰랐는데, 요즘 은근히 올드맥에 대한 향수가 끓어 오르고 있다.
이린시절, 내가 제일 처음 컴퓨터라는 물건을 보고 배우게 된 것이 바로 Apple II였는데, 그당시의 매킨토시 컴퓨터들은 모두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올드맥에 대한 향수를 참지 못하고 있던 즈음...
품안으로 들어오게 된 퍼포마.
계단밑에서 썩고 있던 놈이 임자 만났다며 흔쾌히 공여해주신 김성종님께 감사드린다^^
가져오자 마자 전원꼽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부팅하니...
"띵~~"하는 맥 특유의 부팅음과 함께 방긋웃는 파인더가 반긴다.
바로 그 다음날, 모 교회에서 가지고 온 매킨토시 SE.
썬텐 하나없이 완벽한 상태이지만 키보드와 마우스에는 역시 먼지와 손때가 가득.
교회 지하실에서 몇년간 썩어 있었다니 당연한 결과이지만...
흑백 화면의 상태와 전원은 잘 들어가지만 OS 디스켓이 없어서 부팅은 안된다.
디스켓만 있으면 바로 부팅이 될 것 같다.
워낙에 먼지와 때가 많아서 이놈을 깨끗하게 목욕시키기로 했다.
일단 키보드와 마우스를 완전분해해서 세제를 푼 물에 몇시간 동안 담가 두었다.
때가 충분히 불고 난뒤 치솔을 가지고 빡빡 닦아 주니 뽀오얀 원래의 색이 드러난다^^
아~~좋다.
이제 클래식 시리즈만 만나면 되는데^
이린시절, 내가 제일 처음 컴퓨터라는 물건을 보고 배우게 된 것이 바로 Apple II였는데, 그당시의 매킨토시 컴퓨터들은 모두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올드맥에 대한 향수를 참지 못하고 있던 즈음...
품안으로 들어오게 된 퍼포마.
계단밑에서 썩고 있던 놈이 임자 만났다며 흔쾌히 공여해주신 김성종님께 감사드린다^^
가져오자 마자 전원꼽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부팅하니...
"띵~~"하는 맥 특유의 부팅음과 함께 방긋웃는 파인더가 반긴다.
바로 그 다음날, 모 교회에서 가지고 온 매킨토시 SE.
썬텐 하나없이 완벽한 상태이지만 키보드와 마우스에는 역시 먼지와 손때가 가득.
교회 지하실에서 몇년간 썩어 있었다니 당연한 결과이지만...
흑백 화면의 상태와 전원은 잘 들어가지만 OS 디스켓이 없어서 부팅은 안된다.
디스켓만 있으면 바로 부팅이 될 것 같다.
워낙에 먼지와 때가 많아서 이놈을 깨끗하게 목욕시키기로 했다.
일단 키보드와 마우스를 완전분해해서 세제를 푼 물에 몇시간 동안 담가 두었다.
때가 충분히 불고 난뒤 치솔을 가지고 빡빡 닦아 주니 뽀오얀 원래의 색이 드러난다^^
아~~좋다.
이제 클래식 시리즈만 만나면 되는데^
나는 미국인이 아니며 이글루에 살지도 않고 동물을 사랑하고 경찰보다는 평화를 믿으며 백팩에 붙어있는 나의 조국 국기를 자랑스러워하며, 최강의 하키팀을 가지고 있는 나라, 알파벳의 Z를 "으~지~~"가 아닌 "젯(제트)"이라고 발음하는 나라의 청년이라 열렬히 외치는 이 사내의 이름은 '조' 라고 한다.
캐나다의 몰슨 맥주회사 광고인 이 동영상을 보며 같은 '네셔널리즘'을 소재로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공익광고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일부러 다소 감정의 오버를 통해 캐나다 사람이라면 캐나다 맥주를 마시라는 이 광고는, 정작 맥주보다는 캐나다 사람들이 느끼는 미국인 취급, 또는 미국이 보여주는 은근한 캐나디언에 대한 조롱에 대한 반발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역하다기 보다는 은근한 유머처럼 비춰지는 것은...
아마도 이 광고 제작자의 산뜻한 재치 덕이 아닐까?
캐나다의 몰슨 맥주회사 광고인 이 동영상을 보며 같은 '네셔널리즘'을 소재로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공익광고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일부러 다소 감정의 오버를 통해 캐나다 사람이라면 캐나다 맥주를 마시라는 이 광고는, 정작 맥주보다는 캐나다 사람들이 느끼는 미국인 취급, 또는 미국이 보여주는 은근한 캐나디언에 대한 조롱에 대한 반발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역하다기 보다는 은근한 유머처럼 비춰지는 것은...
아마도 이 광고 제작자의 산뜻한 재치 덕이 아닐까?
세랑캐스트는 예전에는 웹 블로그상에서 바로 들으실 수 있었지만, 불필요한 트래픽등의 문제로 인해 이제는 Podcast 전용 프로그램을 이용해 듣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가끔은 블로그에서 직접 들으실 수도 있게 하겠습니다)
세랑캐스트를 포함한 모든 포드 캐스트를 가장 쉽고 편하게 듣는 방법은 매킨토시, 윈도우즈에 관계없이 Apple의 음악관리 프로그램인 iTunes를 사용하는 것입니다.(iTunes는 윈도우스 버전도 있습니다.)
1. 아이튠스 다운로드는 http://www.applecomputer.co.kr/itunes/download/
2. 아이튠스를 실행하신뒤 상단 메뉴중 고급메뉴를 클릭하고 [포드 캐스트 등록]을 선택합니다.
3. 포드 캐스트 등록 창에 아래 주소를 복사해 넣습니다.
http://serang.co.kr/cast/feed.xml
4. 과정은 이게 끝입니다. 이제 아이튠스가 세랑캐스트 방송을 자동으로 다운로드 하게 됩니다.
세랑캐스트를 포함한 모든 포드 캐스트를 가장 쉽고 편하게 듣는 방법은 매킨토시, 윈도우즈에 관계없이 Apple의 음악관리 프로그램인 iTunes를 사용하는 것입니다.(iTunes는 윈도우스 버전도 있습니다.)
1. 아이튠스 다운로드는 http://www.applecomputer.co.kr/itunes/download/
2. 아이튠스를 실행하신뒤 상단 메뉴중 고급메뉴를 클릭하고 [포드 캐스트 등록]을 선택합니다.
3. 포드 캐스트 등록 창에 아래 주소를 복사해 넣습니다.
http://serang.co.kr/cast/feed.xml
4. 과정은 이게 끝입니다. 이제 아이튠스가 세랑캐스트 방송을 자동으로 다운로드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