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ANG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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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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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968건

  1. 2008.03.07
    흔적 - 팔레트. 10
  2. 2008.03.05
    한국인의 얼굴을 만나다. 2
  3. 2008.03.01
    SerangCast No.57 뮤직 비디오 촬영 뒷이야기와 음악들. 3
  4. 2008.02.29
    마이티 마우스 사랑해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
  5. 2008.02.26
    서설(瑞雪) - 눈덮인 삼청동. 7
  6. 2008.02.26
    꼬맹이들이 아저씨되어 찾아 오다. 2
  7. 2008.02.21
    개인 의뢰작 BSH님 제작중. 4
  8. 2008.02.17
    불멸의 영혼 - Vincent Van Gogh. 2
  9. 2008.02.16
    bataille님으로부터의 선물. 2
  10. 2008.02.11
    숭례문,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10
  11. 2008.02.08
    집결호 - 중국판 태극기 휘날리며 8
  12. 2008.02.04
    잘 만들고 싶지 않다. 21
  13. 2008.02.01
    악마적 히어로 배트맨 - 더 다크 나이트 3
  14. 2008.02.01
    분할. 2
  15. 2008.01.27
    미련... 2
  16. 2008.01.27
    뮤비 미술작업 - 선하의 '샨티 샨티'
  17. 2008.01.23
    마이티 마우스 뮤직 비디오 작업 완료! 6
  18. 2008.01.16
    세트장에서...
  19. 2008.01.14
    징크스. 습관, 또는 집중... 2
  20. 2008.01.12
    작은 녀석 만들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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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은...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에 대한 최소한의 기억이다.

기억은...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한 불완전한 사실의 추억이다.

추억은...
내가 사랑한 누군가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이다.

팔레트에는 나의 흔적과 기억, 그리고 추억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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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음력 1월, 청나라에 간 조선 사절단인 연행사(燕行使) 일행을 촬영한 사진이 최근 공개되었는데, 그중 이 한장의 사진이 마음을 움직인다.
구한말, 기울어져만 가는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로써 만감이 교차했을 그의 얼굴에 비탄과 고뇌가 엿보여 보는 내 마음을 안타깝게 하지만, 큰 갓을 쓴 양반으로, 빳빳하게 다려입은 옷과 단정히 맨 그의 갓끈에서 굽힐 수 없는 선비의 절개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얼굴을, 아니, 이 사진을 계기로 앞으로 '진정한 한국인의 얼굴들을 연작으로 만들겠다'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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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래간만에 돌아온 세랑 캐스트 오디오 방송입니다.
최근에 작업한 익스의 마리오네트, 선하의 샨티샨티, 마이티 마우스의 사랑해 뮤직비디오 
촬영현장의 뒷이야기와 제가 선곡한 음악방송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아래의 플레이어에서 직접 들으셔도 되고, 아이튠스를 이용해서 팟캐스트를 고정등록해 
들으시는 분들은 지금 세랑캐스트의 업데이트를 확인해 보세요.
(고정청취하시면 아이팟등에 저장해 청취할 수 있습니다. 등록방법은 아래 설명을 참고하세요.)


세랑캐스트 고정청취 주소 
http://serang.co.kr/cast/feed.xml 
(아이튠스의 포드캐스트 등록창에 붙여넣거나 입력하세요) 
이외의 청취법은 이전과 동일합니다. 방송참여는 답글이나 이메일 kimserang@gmail.com 으로 
보내주시고, mp3나 aiff, mov등의 포멧으로 사연을 녹음한 음성 파일을 보내주셔도 좋습니다.
세랑캐스트 청취방법 안내
세랑캐스트를 포함한 모든 포드 캐스트를 가장 쉽고 편하게 듣는 방법은 
매킨토시, 윈도우즈에 관계없이 Apple의 음악관리 프로그램인 iTunes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iTunes는 윈도우스 버전도 있습니다.) 아래 아이콘을 눌러 지금 다운로드하고 설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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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에 작업했던 래퍼 Aka 상추 & 쇼티의 [마이티 마우스] 데뷔곡 '사랑해(피쳐링 윤은혜)' 뮤직비디오의 촬영현장 동영상이 공개되었습니다.
준비하고 촬영했던 것은 좀 지났는데, 준비기간이 생각보다 오래걸렸습니다.
이 작품은 커트마다 바뀌는 배경 그리기와 교체작업 말고는 기억나는게 없네요.(힘들어~~)
보다보면 동영상에 낯익은 것이 보일겁니다^^
좀더 자세한 촬영 뒷이야기와 사진들은 뮤비영상 공개후에 올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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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게 이 겨울의 마지막 함박눈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간밤에 쉼없이 내린 눈은 새벽 여명 속에서 서서히 그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두 치가 넘게 수북하게 쌓인 눈길을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뽀드득~ 뽀득" 걸어 다닌다.
괜히 입꼬리가 올라간다. 

새해가 밝고 정월 대보름이 지난지도 얼마 안되었는데, 
부디 이 눈이 서설(瑞雪)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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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삼청동의 풍경은 너무나도 평온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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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에 가까운 축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매달려있는 눈송이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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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浪: 랑)치는 곳에도 눈이 내려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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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훨씬 더 전, 아카데미 프라모델 콘테스트의 심사를 보러갔다가 내 눈에 쏙 들어온 두 고딩 형제들이 있었다.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재능이 반짝반짝 빛나던 두 형제는 동생은 인형을 만들어 색칠하고, 형은 탱크와 배경을 만들어 작지만 멋진 디오라마를 출품했었다.
당시 이 친구들을 눈여겨 본 나는 곧바로 따로 연락해 잡지필진으로 데뷔시켰고, 그중 동생인 광렬이는 내 첫번째 모형제자가 되기도 했다.

수년이 흘러 학교를 졸업하고 형인 성렬군은 군대로, 동생은 호주로 이민을 가서 각각 다른 삶을 살았는데 실로 오랜만에 광렬이가 잠시 귀국을 해서 셋이 함께 만나게 되었다.
연년생임에도 불구하고 영락없는 형 노릇을 멋지게 해내고 있는 성렬이는 항상 믿음직스럽고, 광렬이는 당시 내 심미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54mm 밀리터리 피겨 원형사로 활동중이다.  
셋이서 밤 늦도록 예전 추억과 모형에 관한 이야기에 빠져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잊지않고 찾아준 성렬, 광렬 두 형제가 고맙고 반갑다.
그나저나 요놈들이 벌써 서른을 바라본다니... 내가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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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를 받아서 만들고 있는 인물.
액션피겨는 아니고 가슴까지 재현되는 흉상으로 제작된다.
안경을 써야하는데 만들기가 까다로와서 고민중... 오래간만의 개인 의뢰작이라서 잘 만들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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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벼르고 벼르던 빈센트 반 고흐전에 다녀왔습니다.
반드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너무나 유명한 그 이기에 서울 시립미술관은 미술 전시회가 아닌 시장판 처럼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아마도 제가 다녀본 미술전시중 가장 사람이 많은 전시였던 것 같습니다.

미술학도 시절, 고흐는 여느 미대생에게나 그랬듯이 마음속의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림 속으로 빠져들고 싶을 만큼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별이 빛나는 밤]은 물론이고 눈부시게 화려한 [해바라기], 그리고 귀를 자른 고흐의 자화상은 철없는 예비작가의 가슴을 미치도록 휘저어놓는 최고의 걸작이었습니다.

그의 예술과 삶을 탐닉하다가 그가 세상을 떠난 날짜인 7월 29일이 제 생일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았을때는 마치 고흐의 영혼이 내게 들어오기라도 한듯이 전율에 떨었더랬습니다.
물론, 그의 생몰연대는 저와는 큰 차이가 나므로 사실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내 영혼속에는 고흐의 정신이 들어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덕분에 미술을 하게된 것은 운명이다 라는 황당한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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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중의 하나는 그가 생전에 했던 말 한마디였습니다.
"내 그림이 물감튜브 한조각 값보다는 훨씬 가치가 있다는 것을 언젠가는 알게될 것이다"
 
피를 토하듯 외치는 그의 모습이 떠오르는 이 처절한 고백은 고흐의 삶과 정신세계를 한마디로 대변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림을 그린 평생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해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외톨이였으며, 살아 생전에 단 한점의 유화를 팔았고 미치광이 소리를 들어가며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린 사람입니다.
마치 화폭과 싸움을 하듯 찍고 그어댄 물감으로 만들어진 그의 [자화상]과 [담배를 문 해골]이 묘하게 겹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평생 삶과 세상, 그리고 자신의 영혼과 싸워가며 죽음과 구원을 노래했습니다.
밋밋한 인쇄물이나 리프린트가 아닌 실물로 대한 그의 그림은 평면임에도 평면이 아니었습니다.
'전투적인' 그의 붓터치는 화면에 나무를 세우고 풀을 자라게 했으며 바람이 불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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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사진을 통해 그저 고운 정물화쯤으로 알고 있었던 붓꽃그림인 [아이리스]가 그토록 처절한 그림일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날이 서듯 선명한 원색과 각진 터치는 광기어린 색과의 싸움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오늘, 그의 그림들을 실제로 보기전까지 내 머리속에 있는 고흐의 이미지는 '카드뮴 옐로우' 였습니다.
태양과도 같이 강렬한 노란색은 대표작인 [해바라기]를 비롯해 고흐의 그림 곳곳에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이런 생각은 오늘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고흐의 그림은 냉철함의 상징과도 같은 '코럴 그린'이 곳곳에 들어있었고, 특히 그의 '블루'는 마치 심연과도 같은 슬픔을 가득 담은 블루였습니다.  

고흐의 그림에서는 그의 고통과 슬픔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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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로, 이번 전시에서 제가 가장 감명깊게 본 작품은 바로 이 작품입니다.
[비탄에 잠긴 노인]은 고흐의 작품중에서는 이례적으로 원색이 많지 않은 작품입니다.
병원을 연상시키는 흰벽을 배경으로 의자에 앉아 몸서리치는 슬픔에 얼굴을 가린 이 노인의 모습에서 전 고흐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잔인하리만큼 소외되고 외로왔으며 미치도록 간절했던 그의 예술세계를, '제발 좀 나의 세계를 알아달라! 나는 미쳐버렸다!' 라고 절규하는 고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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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예술계에서 '불멸'이라는 호칭이 허락되는 인물은 단 두명뿐입니다.
장애와 무관심과 싸워 이겨낸 불멸의 음악가인 악성 '베토벤', 그리고 정신과 삶을 모두 저당잡힌채 예술혼을 불사른 '고흐'입니다.

오늘, 그 '불멸의 영혼' 고흐의 열정이 절 설레이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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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랑월드를 통해서 참 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만들게 됩니다.
통신선을 타고 흐르는 이 미묘한 인연들은 종종 사람들을 상처받게 만들기도 하지만, 역시 아직까지는 마음이 따듯해지는 추억들을 더 많이 만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이원 시인님께서 빗방울과 함께 선물 을 보내주시더니, 이한수님이 메탈 스티커를, 이번에는 bataille님께서 또 값진 선물을 보내주셨습니다.

음반회사에서 일을 하시는 bataille님께서 아름다운 음악들을 한가득 보내주셔서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느낌입니다.
이 아름다운 소리와 시간들을 선물해주신 bataille님께 무한감사를 드리며, 어찌 보답을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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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 하나에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20여년전, 난생 처음 서울에 발을 디디며 서울역에 내린후 바로 보게 된 숭례문은 내게 '아, 여기가 바로 서울이구나!' 라는 감흥을 선사한 위대한 건축물이었다.
개인적으로 한국사 공부를 하며 한없이 초라한 우리나라의 문화재 관리에 분통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그나마 이런 건물들이 남아 있는 것이 어디겠는가 하며 스스로 위안을 하고 내심 뿌듯해 하곤 했었다.
임란당시 일본에 의해 훼손되고, 병자년에는 불태워지며, 다시 일본에 의해 무차별로 파괴되는가 하면 개발이란 명목하에 마구잡이로 변질되어 버린 우리 문화재들중 그나마 그 원형을 유지한 몇 안되는 서울의 자랑이 바로 숭례문 아닌가.

태조께서 조선을 창건하며 세워진 도성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남문인 숭례문은 지독히도 불운한 한국사의 아픔을 모두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진정 당당한 우리 서울의 상징이었고 그래서 '나라의 가장 보배로운 물건' 제1호가 될 수 있었다.
숭례문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아래의 사진에서 보듯 600여년간 백성들과 삶을 같이 해온 '벗'이었다.
숭례문 주위에는 백성들의 삶이 펼쳐지는 상가거리가 있었고, 그것이 곧 지금의 남대문 시장이다.
100년 전만해도 숭례문은 백성들 삶의 터전이자 한낮의 찌는 태양을 막아주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며 늘 그곳에 서있는 보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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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인터넷에서 숭례문으로 나와있지만 앞에 반원형의 옹성구조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흥인지문(동대문)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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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은 임진왜란, 병자호란같은 대란에서 살아 남았고, 잔혹한 일제에 의해 헐려버린 돈의문(서대문)과 같은 참사도 피할 수 있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우뢰와같은 폭격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었다.
그런 숭례문이 불타버린 것이다.(아래 사진은 한국전쟁중의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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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은 함경도 백두산에서, 어떤 것은 바다의 비바람을 견뎌내며 자랐을 낙락장송에 제를 올리고 그것을 베어 육로로, 때로는 물길로 올라와 껍질을 켜내고 먹줄 한번 튕겨 대패질을 하던 대목장의 손길이 고스란히 뭍어있던 600년 전통의 건물이 단 몇시간만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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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은 단순히 불에 타고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다.
불길이 그의 속살을 태우며 나는 흰 연기는 제발 살려달라고 외치는 절규였고, 날름거리는 불꽃속의 선명한 단청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 처럼 보였다.
마침내 그 지붕이 무너질때, 나는 6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녀온 그의 죽음을 보았다.
더이상 그의 명예와 혼백을 훼손치 말아야 한다.

감히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최소 600년, 아니 수천년을 당당히 버티고 서있을 수 있는 새로운 몸을 그에게 주어야만 600년의 역사가 살아숨쉬는 그의 혼백이 다시 그곳에 깃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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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전, 내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밀리터리 테크니컬 어드바이저(군사자문)로 참가했을때만 해도 '과연 국내에서 이 영화를 찍어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해봐야만 했다.
기술적인 문제를 떠나서 오랜동안 전쟁영화의 맥이 끊겨있던 상태에서 전쟁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낯설 각 분야의 스텝들이 이런 특수장르의 영화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가장 큰 내 의문점이었던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그래서 무척이나 어렵게 제작된 영화였고,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전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밴드 오브 브라더스]라는 훌륭한 텍스트가 있었기에 이것이 모든 스텝들에게 좋은 교본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헐리우드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한국적인 재료와 양념을 버무려 만들어진 것이었고, 이제 소개할 개봉 예정작 [집결호]는 그 '태극기 휘날리며의 중화풍'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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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결호'는 1940년대 당시 중화인민군에서 사용하는 신호용 나팔소리중 '퇴각나팔 소리'를 듯한다.
영화는 중국 모택동의 인민정부와 장개석의 국민당군간의 국공내전을 배경으로 시작되며, 태극기 휘날리며가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시작에 배치한 것과 유사한 설정과 분위기로 진행이 된다.
탱크를 앞세워 밀려오는 국민당군의 공격 최전방 저지선을 맡은 중대장 구즈디를 주인공으로 그들의 영웅적인 최후와 명예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는 이 영화는 훗날 중화인민군의 항미 원조 전쟁(한국전쟁 참전)까지도 양념 처럼 다루고 있다.

참고로 이 영화를 두고 빨갱이 영화라는둥, 중공군 참전을 미화한다는 등의 이념적인 시각으로 보는 네티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이 영화가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중국에서 만든 영화가 그들의 시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고, 이런점에서 독일에서 만들어진 전쟁영화 '스탈린 그라드'나 러시아 영화인 '9중대', '즈베즈다'도 사실 이런 이념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국내에서 개봉이 되어서는 안되는 영화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논리라면 팍스 아메리카 사상으로 점철된 헐리웃의 수많은 영화 역시 배격해야할 대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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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보면 태극기 휘날리며의 냄새를 물씬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영화를 연출한 감독 스스로가 태극기 휘날리며의 영향으로 만들게 되었다는 말을 공공연히 밝힌 것에서도 알 수 있을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태극기 휘날리며의 제작진이 상당수 참여했기 때문이다.
강제규 필름과 명필름이 합병해서 만들어진 MK픽쳐스가 이 영화의 제작에 참여를 했고, 이에 따라 태극기 휘날리며 당시 특수효과를 담당한 데몰리션의 정도안씨, 시각효과를 담당한 강종익씨, 사운드 이펙트를 담당한 김석원씨, 특수분장의 신재호씨등이 이 영화에 참여해 태극기 휘날리며를 만들며 쌓은 노하우를 고스란히 펼쳐 놓았다.

사실 집결호의 전투효과와 장면연출은 오히려 태극기 휘날리며의 그것보다 더 훌륭하다.
실제로 수년간 시간이 흐르며 기술이 더욱 발전했을뿐만 아니라 중국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보니 태극기 당시 시간과 예산문제로 포기하거나 축소해야만 했던 부분들이 이 영화에서는 충분히 구현이 된 것이다.
게다가 중국 특유의 스케일과 물자 동원 능력, 그리고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비장미가 더해지며 집결호는 한편의 훌륭한 전쟁영화가 갖출 대부분의 요건을 만족시킨다.
태극기 휘날리며 당시 헐리웃과는 차별화될 이미지를 찾기 위해 백병전을 전면에 내세우고 고민하던 내 생각을 떠올리며 보게된 집결호는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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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중대장 구즈디는 마치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태(장동건)와 라이언 일병구하기의 톰 행크스를 뒤섞어놓은 듯한 인물이다. 다양한 전투 액션씬을 소화해낼 뿐만 아니라 후반부에 깊은 감정연기까지도 멋지게 소화해서 극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영화는 공산권 무기와 국민당군이 사용한 서방의 무기가 어우러지며 당시의 시대적 재연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시각적으로 충분한 볼꺼리가 제공되고 만약 약간의 군사지식이 있는 분이라면 전투씬에 등장하는 M26 퍼싱 전차의 위용에 환호성을 내지를 수도 있을 것이다.(후반부에 등장하는 깡통 셔먼은 좀 깨지만...)

전쟁영화 매니아의 시각으로 보는 멋지거나 재미있는 장면 포인트들.
1. 막대한 물량으로 등장하는 국공내전 당시의 군복, 군장비들. - 저것들을 다 재현한 스케일이 부럽다.
2. M26 퍼싱 전차의 등장. - 단연 압권이다. 처음에는 실물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는데, 자세히 보니 중국제 차량을 개조해 만든 것 같지만 효과는 만점!
3. 깡통 셔먼. - 퍼싱과는 반대로 대충 만들어 등장하는 셔먼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그것보다도 못하다.
4. 항미 원조 전쟁 장면 -  전투씬은 없이 잠깐 에피소드로 등장하지만 국군을 칭할때 '이승만 군대'라고 말하는 장면은 고증 100%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중화인민군과 북한군은 남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이승만 괴뢰군'으로 불렀다.
5. 무기반납 장면에서 등장하는 영국제 소총 에피소드. - 국공 내전, 한국전을 거치며 생긴 중국군의 잡탕무기체계를 잘 보여주는 장면. 실제로 이 시기 중국군은 자국 무기는 물론이고 독일, 소련, 일본, 미국, 영국제 무기들을 닥치는대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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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볼때 이 영화는 실제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어져 리얼리티 면에서도 훌륭하고, 이를 재현해낸 영화의 비주얼 역시 훌륭하다.
영화가 문화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인민의 교화시키는 하나의 도구라는 사회주의 정신과 정책으로 미루어볼때 집결호는 중국인민들의 역사적인 의식을 고취시키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고 이런 사상적인 배경을 떠나 우리가 보기에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가장 불쾌하게 보게 될 사람들은 우리가 아닌 영화속에서의 적군, 즉 장개석의 국민당군이며 그들은 바로 지금의 대만(타이완) 국민들이다.
현재도 중국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중국은 지금까지도 '저들을 바닷속으로 밀어 넣어 버리겠다'는 말을 서슴치 않을 정도로 대만을 멸시하고 있다.

마치 우리와 북한과의 관계같지 않은가?
이게 바로 내가 집결호를 중국판 태극기 휘날리며라고 부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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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게 등장하는 퍼싱 전차. 국민당군이 사용하는 버전과 나중에 한국전쟁 장면에서 미군이 사용하는 것 두 장면에 걸쳐 등장한다. 처음에는 가동되는 실물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는데, 자세히 뜯어보면 실제차량이 아니라 소련제 T계열의 전차를 카피해 만든 자국산 차량을 개조해서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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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탑 위의 기관총 탄약통을 보면 미국제 탄약통이 아닌 소련/ 중국군식의 탄약통이 부착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궤도와 로드휠(바퀴) 역시 퍼싱의 그것과는 다르다. 휠만 보면 T-34용 스파이더 휠과 닮아있는데, 정확히 어떤 차량의 휠인지는 찾아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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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싸하게 만들어진 퍼싱과는 달리 여기 등장하는 셔먼은 완전히 '깡통' 수준이다.
아무리 중국이라고는 해도 역시 예산이 좀 부족했거나 시간이 촉박해 대강 날림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타이거를 연상시키는 수직 전면 장갑판과 짖눌려버린 포방패에서는 대략 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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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연극제에서.

돌이켜보면 내가 미술을 하게되고 모형을 만드는 사람이 되는데에는 초등학교 시절 미술선생님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방학숙제로 만들었던, 찰흙을 빚어 만든 파도를 뚫고 솟구쳐 오르는 돌고래를 보신 미술선생님이 '세랑이는 커서 화가나 조각가가 되면 좋겠구나'라는 그 한마디가 내 인생에 첫번째 전환점을 찍어준 것이다.

이전까지도 무언가를 끄적이거나 만드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것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거나 잘 만들고자하는 노력따윈 전혀 들어있지 않은 것이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일차원적인 욕구에 의해 만든 것이었고 내가 남들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지 못그리는지에 대한 개념 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흙장난과 낙서하기를 좋아했던 나에게 '미술'이란 두 글자를 각인시켜준 그날의 기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나의 목표이자 꿈은 연극과 영화를 향하고 있었다. 연기와 영상은 떠오르는 이미지에 가득차 있던 한 소년의 미래에 대한 뚜렷한 희망이자 오롯한 외길처럼 보였다.



고3 여름방학, 또한번의 전환점이 찾아오게 된다.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하던 내게 미련이 남아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미술'이란 두글자는 잊고 있었지만 여전히 만화그리기와 프라모델 만들기는 내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휴식이자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였다.
미술선생님의 권유로 나간 사생대회에서 입상하게된 것을 계기로 견학을 가게 된 한 미술대학의 서양화 실기실에 들어서는 순간, 난 새로운 전환점에 발을 들여놓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코 밝지 않은, 어찌보면 다소 음침하게 느껴지는 실내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했고 세로로 길게 난 창을 통해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코를 톡 쏘는 테레핀유의 송진향과 키를 훌쩍 넘겨 벽면을 가득채운 약 200호 정도의 그림이 앞에 서 있었다.
그날의 분위기는 완벽하게 기억하지만 그 그림이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한데, 그게 어찌되었던간에 입시를 불과 두달반 정도 남긴 내 현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인상을 남긴 경험이었고 그 날 이후 난 미대입시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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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1학년 실기실에서 내 습작들과 함께.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서양화 전공의 미대 1학년생인 나는 한 학기 동안 또 석고상을 그려야했다.
석고상 그리기는 분명 기초데셍력을 기르기 위한 과정이었겠지만, 늦깎이 미대입시를 준비하느라 남들의 세배, 네배의 양으로 지겹게 해댄 석고덩어리 그리기는 정말 재미없었다.
너무나 지겨웠고 고지식한 교수진의 방식에 대한 맹랑한 내 반항심은 석고상에 보이는 모든 명암을 반대로 바꿔그리기로 나타났다.
어두운 곳은 밝게 그리고 밝은 곳은 어둡게 처리하는, 마치 사진의 네거티브 필름에 찍힌 것 처럼 말이다.
교수님께 불려가 혼쭐이 났지만 난 나대로 내 주장도 함께 말씀을 드렸다.

"잘 그리기는 쉽습니다. 잠자코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은 더욱 쉽습니다. 전 쉽게 잘 그리는 것 말고 좋은 작품을 그려내고 싶어서 미술대학에 왔습니다."

깐깐하고 무섭기로 소문났던 그 교수님의 표정이 일순 누그러지며 난 더이상 혼나지 않아도 되었고 덤으로 그 수업을 마칠 즈음 좋은 성적까지 받게 되었다.


1990년 취미가 창간 이후, 난 십수년을 한결같이 모형을 만들어왔다.
모형잡지사의 필진으로 시작해서 직원으로, 그리고 편집장을 거치며 건담, 캐릭터 인형, 전차, 비행기, 함선, 밀리터리/ 히스토릭 인형을 모두 섭렵했고 단품, 비넷, 디오라마를 가리지 않고 만들어댔다.
어떤 장르이건 머릿속에 좋은 이미지가 떠오르기만 하면 그것을 만드는 시간은 새로운 도전이자 즐거운 행위였다.
미친듯이 모형을 만들었고 많을때는 한달에 1/48 비행기 한대에 1/16 빅스케일 전차와 인형까지 해치우곤 해서 이대영 전 편집장님께서는 날보고 모형을 풀빵찍듯 만들어 댄다면서 '모형공장'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게 있어서 모형제작은 단순히 그 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표현해보는 일이었고, 그것이 미치도록 즐겁고 재미있어서 시간이 가는줄도 몰랐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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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사 시절 모형색칠중

괴로왔다. 
모형을 만드는 시간이, 모형잡지를 만드는 시간이 지옥과도 같았다.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 다 내팽겨치고 어딘가로 숨어들고 싶을때 조차도 내 손은 쉬지않고 에폭시 퍼티 반죽을 주무르고 있거나 사포질을, 또는 붓을 잡고 인형의 얼굴을 색칠하고 있었다. 
10년을 넘게 직업으로 모형을 만들고 나니 머리속으로는 딴생각을 하면서도 내 손은 마치 정교한 기계와도 같이 탱크에 워싱을 하고 블랜딩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모형이나 이미지를 만들기 보다는 독자들이 보고싶어하는, 또는 독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몸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고 오로지 완성만을 위한 한없이 지루한 과정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매달 마감을 앞두고 착착 완성작을 뽑아내고 그걸 사진으로 찍어 기사를 만드는데 익숙해진 내 몸은 더이상 내것이 아니었고, 이미 나는 모형을 만드는 기계가 되어있었다. 진짜 '모형공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만성 목디스크로 인한 왼팔 마비증세까지 와버렸다.
팔에 힘이 빠지고 바늘로 쑤시는 듯한 통증에 왼손으로 모형을 들고 있을 수 조차 없어서 탱크를 책상에 내려놓은채 엎드리다시피하고 오른손만으로 만들고 색칠을 해야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잡지 마감시간은 칼 같이 다가오고 있었다.
몇번이고 마음을 다잡으며 한달 한달을 버텨가던중 바로 그 날이 찾아왓다.
내가 더이상 나만의 생각과 이미지를 담은 '작품'이 아닌 '완성작'을 뽑아내는 기계가 되어가고 있음을 통렬히 알아차린 그 날 이후로 난 더이상 이 일을 계속해나갈 힘을 잃고 말았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라던가 건강문제같은 표면적이고 현실적인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잘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후로 지난 2년간 난 모형에 손도 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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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이 싫어서가 아니라 더이상 습관처럼 모형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십수년을 지속한 습관은 무서운 것이어서 종종 미치도록 모형을 만들고 싶을때도 있었지만, 차라리 나는 모형이 아닌 옷을 만들어 입거나 그림을 그렸고, 더불어 바이크를 만들어 타고 여행을 다녔다.
의도적으로 모형을 멀리했고, 대신에 미술전시나 영화, 책을 보는 일이 많아졌으며 그저 혼자 바이크를 타고 이름모를 시골길을 달렸다.
모르는 사람들은 팔자좋게 유람을 다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십수년동안 나를 지배해오던 것들과 싸우는 일 이었고, 그것들을 털어버리는데 온 힘을 다해야만 했다.
마감이 지나면 모형잡지라는 이름으로 팔리게 될 '138페이지의 백지'에 무언가를 채워넣으려는 생각으로 꽉 차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 머리속에 조금씩 새로운 생각들과 경험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겨우겨우 나는 다시 모형 공구상자를 열 수 있었다. 
 
모형을 잘 만들기는 쉽다.
물론 모형을 잘 만들기위해서는 오랜시간과 경험, 그리고 각종 테크닉을 섭렵하고 그것을 온전한 자기 것으로 만들기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노력'을 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다.
잘 만든다는 것은 '감성'보다는 '기능'의 문제이며 기능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시간과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잘 만들기는 쉽지만 '좋은 작품'을 만들기는 어렵다.

나는 잘 만든 작품보다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다.
신기하고 정교하며 놀라운 작품보다는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다.
그래서 내 작품을 보며 사람들이 '어떤 재료로 만들었나요? 도료는 어떤 것에 무슨 색을 쓴건가요?'라고 묻기보다는 '어떻게 이렇게 슬픈 인형을 만드셨나요?', '보고있으면 마음이 따듯해지는 기분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그것이 반드시 모형으로 불려지지 않아도 좋고 스케일이 맞지 않아도 좋으며 꼭 잘만들고 잘 색칠되어보이지 않더라도, 그저 내 머리속에 있는 이미지와 가슴속의 감성을 온전히 담아내는 그릇이면 좋겠다.
거창하게 스스로 '예술'이라는 타이틀을 걸지 않아도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내 감성과 이미지를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좋은 작품, 진정한 예술이 될 것이다.

모형제작이란 것을 직업으로 삼은지 올해로 18년째, 난 또다시 새로운 전환점을 찍고 있다. 
당돌하고 거칠었으며 미숙했지만, 순수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좋은 작품을 그려내고 싶다고 생각했던 20살 어느 여름날 그때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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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다시 붓을 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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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분명 히어로물을 보며 자라긴 했는데, 의외로 난 히어로물에 그다지 열광을 하지 않는다.
과학관련 책을 미친듯이 탐독했던 나는 수퍼맨 1탄을 어머니 손 붙잡고 극장에서 보며 지구의 자전을 거꾸로 돌려 시간을 되돌리는 황당한 장면에서 흥미를 잃어 버렸다.

미국판 코믹스 히어로들은 모두 이런 비상식적인 설정으로 가득차 있었기때문에 상상력을 자극하기 보다는 유치하게 느껴졌고 내가 이후 '역사'라는 키워드에 집착하게 된 것 역시 어쩌면 이런 어린시절의 기억에 대한 반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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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를 유일하다시피 열광케 만드는 것이 있으니 단연 배트맨이다.
코믹스나 옛날에 만들어진 개그에 가까운 TV시리즈가 아니라 팀버튼에 의해 재탄생한 배트맨은 그 어둡고 악마적인 이미지와 함께 새로운 히어로의 이미지를 내게 각인 시켰다.

난 배트맨을 볼때면 유럽의 오래된 건축물의 꼭대기에서 볼 수 있는 그로테스크한 악마나 괴물상들이 떠오른다. 길고 까만 망토를 드리우고 건물의 석상에 서 있는 이미지야말로 배트맨의 본 모습이고 알수없는 초능력이 아닌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간직한 '박쥐 탈을 쓴 인간'이란 설정은 매혹적이다.
마치 70년대 허영만 화백의 만화 '각시탈'을 연상시키는 이런 설정은 다중적인 인격과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어서 그 자체로 매우 철학적이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다시 찾아올 새로운 배트맨 The Dark Knight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보다 강력하고 중세기사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모습이 바뀌었다.
배트맨의 수트는 더이상 쫄쫄이 타이즈가 아닌 갑옷처럼 바뀌었고 미간의 주름은 더욱 확실해져 배트맨 고유의 어두운 기운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 내고 있다.

배트카와 더불어 배트 바이크를 타고 망토를 휘날리며 달리는 배트맨을 빨리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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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더 다크 나이트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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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로 아름답고 완벽한 공간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無의 공간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완벽한 무의 공간은 존재할 수 없기에 
공간은 필연으로 나눠지고 채워지게 된다.
분할은 그래서 현실의 미학이다.
저녁을 먹기위해 들른 식당의 천정이 제법 눈을 즐겁게 하는 분할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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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겨울 해는 드리워지는 어둠을 조금이라도 피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 해를 바라보는 나뭇잎 또한 벽에 제 몸을 붙이고 매달린다.

둘다 아직은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2008.01.27. PM 05:25. 삼청동 뒷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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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작업한 신인가수 선하의 뮤직비디오 '샨티 샨티'가 공개되었다.
80~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분들이라면 익숙할 몽환적인 유로댄스풍의 곡인 샨티 샨티는 
'제2의 이효리'라는 수식어로 홍보중인 미스코리아 출신 가수인 선하의 데뷔곡이다.
단순하지만 중독성이 강한 멜로디와 중성적인 매력을 지닌 가수 
선하의 비주얼이 합쳐져 발생할 여파가 어느정도일지 지켜보자.



신인가수 샨티의 뮤직비디오 촬영중의 몇 컷.
80개가 넘는 대형 스피커 세트는 진정 간지 좔좔~ 촬영내내 실제로 이런 방을 하나 만들어 음악을 듣고 싶다는 욕망이 무럭무럭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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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준비과정중 포스팅한바 있는 벽 세트에서 촬영중인 가수 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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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두주간 정말 사람의 혼을 쏙 빠지게 했던 두편의 뮤직비디오 작업이 모두 끝이 났다.
지난번 익스 작업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쉬울 줄 알았던 작업이 아주 사람 피를 말려 놓는 일이 될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오는 25일에 공중파를 통해 데뷔하게 될 신인가수 '선하'와 역시 신인 힙홥 듀오 '마이티 마우스'의 선전을 기대하며 두 가수들이 데뷔를 해야만 사진을 올릴 수 있기에 자세한 포스팅은 후에 하기로 한다.
한가지만 '천기누설'을 하자면, 짧지만 마이티 마우스의 뮤직 비디오에서는 랩터도 출연을 한다!
기대하시길... 개. 봉. 박.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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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에 흩뿌려진 물감들처럼 자유로운 사고와 삶이 주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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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 삼일간 면도를 안했더니 아랫턱이 깔깔하게 수염이 자랐다.
언제부터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난 몰두하는 일을 할때나 작업중에는 면도를 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원래 수염이 많고 빨리 자라는 편이라 하루만 면도를 하지 않아도 까칠한 수염이 덥수룩해지고, 특히 수염이 강하고 많아서 전기 면도기로는 깨끗하게 밀리지 않아 항상 손면도를 해야하는 탓에 더욱 귀찮은 일이기도 하다.

그때문인지 높은 집중력이 필요한 일, 요컨데 예전에 잡지 마감기간이라던가 모형제작을 할때, 그림을 그리거나 작품구상을 할때는 면도를 하지 않게 되었다.
산도적같이 덥수룩해진 수염은 곧 내가 뭔가에 한창 몰두하는 중이라는 일종의 'Sign'이며 그 진척도 역시 수염의 길이로 가늠할 수 있다.
삼손의 머리털 처럼 수염을 기른다고 해서 힘이 더 세지거나 일이 잘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내게 있어서 수염은 곧 '두뇌의 작동상태와 정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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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를 그만둔 뒤로는 오랫동안 만들어 보지 않았던 작은 스케일 만들기에 익숙해지기 위한 습작으로 1/16스케일의 인형 얼굴 하나를 만들어 보았다.
특별한 모델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밀리터리 인형에 어울릴 동양인 헤드로 컨셉을 잡고 강한 인상을 가진 얼굴 하나를 만든다.
예전에는 1/35스케일 인형도 많이 만들었는데, 역시 손이 놀고 있으면 감각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지사.
한동안 액션피겨 헤드를 만들며 큰 스케일은 대략 감이 온듯 하여 작은 스케일 연습에 들어간다.
1/16스케일 인형은 안면부의 크기가 약 1Cm에 불과하기 때문에 섬세한 묘사도 중요하지만 그 작은 크기에서 원하는 인상을 뽑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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