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ANG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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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e Art'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14.05.01
    Serang's Booth in Art Toy Culture 2014, Seoul, Korea. 2
  2. 2013.05.14
    학술과 예술의 차이. 8
  3. 2012.11.20
    과거와 현재 사이의 숙명적 여행
  4. 2008.06.18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23
  5. 2008.04.11
    걸레같은 나의 육신에 시위를 걸다. 5
  6. 2008.04.02
    디지털 사군자 - 도도한 그녀 1
  7. 2008.03.25
    프로젝트 'D' - II
  8. 2008.03.25
    프로젝트 'D'
  9. 2008.03.24
    양면성 연작 - 눈물 짓는 자화상. 6
  10. 2008.03.19
    지하실에서 윤두서를 만나다 - 조선의 초상 두번째 2
  11. 2008.03.18
    초상화로 보는 드라마 '이산'의 어용화사.(전편) 2
  12. 2008.03.07
    흔적 - 팔레트. 10
  13. 2008.02.17
    불멸의 영혼 - Vincent Van Gogh. 2
  14. 2008.02.01
    분할. 2
  15. 2008.01.08
    The Wall - 뮤직비디오 미술작업과 랩터. 15
  16. 2007.10.18
    신화와 환상, 그리고 꿈에 대한 해부학적 접근
  17. 2007.10.17
    Angel & Devil 연작을 위한 스케치 No.1
  18. 2007.08.24
    The Other Side Of Soul. 9
  19. 2007.05.27
    일요일 오후, 붓과 물감... 그리고 생각. 10


전시 [ART TOY CULTURE 2014 SEOUL] 
-THIS IS NOT a TOY- 

일시: 2014. 05. 01 ~ 2014. 05. 05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 알림 1관 
등급: 전체관람가 

2014. 05. 01 (목) – 오후 4:00 ~ 오후 8:00 (입장마감 오후 7:00) 
2014. 05. 02 (금) ~ 05. 04 (일) – 오전 11:00 ~ 오후 8:00 (입장마감 오후 7:00) 
2014. 05. 05 (월) – 오전 11:00 ~ 오후 6:00 (입장마감 오후 5:00) 

현장 판매가 
성인 (19세 이상) 12,000원 
학생 (7 – 18세) 10,000원 

※ 예매시 10% 할인 
※ 20인 이상 단체 20% 할인 (1544-6399 전화 예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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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 실증사학, 과학적 근거 다 좋다.

그런데 소위 학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기계적인 시각과 자세에 있다.

수십, 수백, 수천년전의 일들을 자신이 본 텍스트들에만 의존하여 재단하고 유추하고 판단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있는가.

그야말로 장님 코끼리 다리 더듬는 격이다.


역사를 들여다볼때는 기록을 바탕으로 하되 '당대의 사람이 되어 당대의 시각으로 모든 사건과 사물을 봐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잘난 박사님들이 되어서 엄청난 돈을 들여 만든 거북배가 왜 물이 새는지, 왜 바다에서는 항해를 할 수 없는지에 대해 그 근본을 단 한번이라도 들여다 보았는지 묻고싶다.


일제시대에 바닷배가 아닌 강배들 자료를 바탕으로 모 박사님께서 '우리나라 배의 밑은 평평한 평저선이다'라고 단정지어 버린이후 단 한번도 그 이론과 논거를 실증해볼 생각조차 안하고 그대로 정설로 굳어져버린 이 웃지 못할 상황.

중국에서 발견된 고려선의 배밑이 첨저형과 평저형의 중간쯤되는 독특한 형태인 것은 어찌 설명할 것인가?


전통적인 방수 기술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면 그 '잃어버린 기술'을 찾아내고 복원라려는 노력은 안하고 물이 샐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일단 만들고 보는 이 저급함을 어찌할 것인가?

'현대의 기술로도 안되니 아마 그 옛날에도 물이 샜을 것이다. 아마 물을 수시로 퍼내며...'따위의 말을 어찌 지껄일 수 있는가!


매번 말하지만 우리의 선조들은 바보가 아니다.

배우고 익히고 활용하는 기술과 학문과 지식이 현대의 그것과 '다를뿐'이며 오히려 오늘날 박사님입네하고 으시대는 그대들은 넘볼 수 없는 광대한 지식을 섭렵하신 분들이다.


나는 비록 학술을 하는 당신들에 비해 배움은 짧을지 모르나 예술가로써, 그리고 민간 전통군사사를 좋아하고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임진왜란 당시 통제사 어른의 마음으로, 그분의 시각으로, 당대의 군인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고 느끼려 노력했다는 점 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는 두정갑의 둥근 고리의 정체를 증명하는 자료가 미비하다고 해서 그것을 생략해버리지 않았고,

동개의 자주색 띠를 없애버리지 않았으며,

'구군복은 갑옷의 속옷이다'라는 기록을 충실히 따랐으며,

정체불명의 개량활이나 습사용이 아닌 전투용 활을 찾아 재현했고,

재현의 어려움과 비용에 타협하지 않고 실제 옷감의 무늬를 그대로 따랐으며,

허리에 찬 전통환도가 왜소해보인다고 쓸데없이 큰 칼을 손에 들고 다니게 만들지 않았고,

두정의 볼록한 형태를 재현하기 어렵다고 똑딱이 단추를 단 허접한 디테일로 타협하지 않았으며, 

난데없이 조선시대 도깨비 장식에 신라귀면 얼굴을 갖다 붙이지도 않았다.


다만 그렇게도 보고싶었지만 볼 수 없던,

통제사 영감의 모습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고자 이봉상 장군의 초상을 보고 또보고, 난중일기를 읽고 또 읽으며 '예술가로써의 내 상상력'으로 마침내 그분을 뵈었을 뿐이다.


이것이 '내가 뵌 통제사 영감'의 모습이고, 바로 이것이 학술과 예술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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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랑. 나는 이분을 만나면서 내가 그간에 느꼈던 모든 상념들과 파편적이라 있는 지식들, 경험들을 모두 놓아야만 했다. 언젠가 황지우 시인이 김용택 시인을 평했던 말이 떠오른다. “세상에는 종류의 시인이 있다. 단지 시를 쓰기 때문에 시인인 그런 사람이 있고, 하나는 시를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되는 사람이기에 시인이라 불리는 그런 사람이 있다.” 시인의 평은 1994 나에게 작가는 무엇인가에 대한 기초적인 이미지를 제공했다.

김세랑. 작가는 후자에 속한다. 지위도 명예도 세속의 모든 자기 위안도 그의 작품 세계를 덮지 못한다. 작가는 스스로 그렇게 작업을 뿐이다.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작가도 1990년대에 여느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미술대학을 다녔다. 작가는 이때 근거 없고 표현할 방법 없이 커다란 난관에 부딪혔다고 한다. 작가는 미술작업에 대한 테크닉도 아니요 재료연구도 아니고 단지 예술의 본연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제도권의 천편일률적인 습속(習俗)만으로는 예술의 본연으로부터 가까워지기는커녕 요원해지기만 했다. 작가는 못할 우여곡절들이 점철되어 학교라는 제도와 차츰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에 진출한 이후에 작가는 크나큰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현대미술은 개념이 전혀 정립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로부터 개념을 요구한다. 그러나 정작 대가(大家) 평범한 작가의 차이는 누가 제도라는 연결그물에 보다 많이 포섭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작가는 연결그물을 쌓는 시간을 아끼는 대신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다짐했다.

언젠가 백남준 작가는예술은 텃세다. 그것은 보편이 아니다.” 표명했다. 작가는 좋은 사람을 좋아한다. 작가는 텃세로 자기 자리를 유지하고 차지한 유명인이 아니라 인류에게 심적 위안과 힘을 보편인을 사랑한 것이다. 음악가, 선의의 정치가, 화가 작가의 영혼과 마음을 빼앗은 사람들에 대해서 연구한다. 주위 사람들은 작가의 전관(全觀, total view) 지식에 대해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역사, 철학, 사회학, 인류학, 문학, 영화사, 미술사, 과학사, 복식사, 공학, 해부학, 기계장비, 인체측정학 온갖 분야의 배경지식에 두루 손길이 뻗쳐있다.

작가의 궁극적 미학은 시대의 복원과 인물의 권리해방에 있다. 지미 핸드릭스, 베토벤, 빈센트 고흐, 윈스턴 처칠은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특정 시대의 의미와 키워드를 짊어지고 있는 무게의 아이콘인 것이다. 짊진 자들을 복원해서 작가가 얻으려는 취지는 무엇인가? 과거에 대한 깊은 연구와 천착은 오히려 우리가 사는 시대의 의미에 대해서 깊게 생각할 있는 계기를 형성해주는 총체적 해석일 있다. 베네딕트 크로체는역사는 모두 동시대적이다.” 명언을 남겼다. 지금을 사는 현재에 대해서 우리는 해석을 내릴 없다. 다만 과거를 현재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행위로부터 현재의 의미에 대해서 음미할 있을 뿐이다. 김세랑 세계의 요체는 비주얼로 구성한 역사 해석이라고 정의할 있다.

주지와 같이 김세랑이라는 이름 석자는 피규어를 다루는 현대미술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작가가 어째서 피규어라는 형식과 장르를 선택했는지 묻지 않을 없다. 작가는 (Ron Mueck)이나 마우리지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처럼 스펙터클한 형상을 충분히 제작할 수도 있었다. 일례로 작가는 일본 반다이사() 대규모 건담을 제작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어째서 피규어인 것인가? 그것은 에드워드 벌로우가 이야기한 심적 거리(psychical distance) 극단적으로 줄이기 위해서이다. 작가와 대상 사이의 감정이입(Einfühlung) 극화되는 수단으로서 작가는 피규어를 택한 것이다.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관객은 작품 앞에 극단적으로 다가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 작가는 시대에 대해서 유럽 액셔니스트(actionist) 드보르(Guy Debord)스펙터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라는 명제에 대해서 깊은 명찰을 한다. 작가는 스펙터클과 스펙테이터라는 이분법의 일방적 통행을 통해서 평등의 기회가 상실된 것이 현대의 의미라고 재고한다. 이러한 강압적 이분법을 미연에 봉쇄하는 힘은 미적 대상에 정치(精緻) 아름다움, 덱스터리티(dexterity) 구가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덱스터리티를 완성하기 위해서 작가는 즐거운 작업과 괴로운 노동 사이에서 무수히 진동한다. 모든 형상의 완성은 반죽의 터치에서 비롯된 것이며 채색 역시 스프레이 공정이 아닌 순수 붓질(brush stroke) 의한 것이다. 의상 작업은 특정 시대에 국한 되었던 옷감을 복원해서 바느질한 작업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집약적 노고의 의미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의미가 내재되어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업을 역사적 인물(historical figure) 극단적으로 가깝게 다가간다. 지미 핸드릭스를 예로 들면, 핸드릭스가 활동했던 60년대의 흑인 인권상황, 군부대의 생활상, 60년대의 복식사, 핸드릭스의 가정사, 당시의 무대미술, 악기에 대한 모든 연구를 감행하며, 하루 24시간을 핸드릭스의 음악에 파묻혀서 심적 거리가 최소화된 상태로 몰입된 가운데 비로소 작업을 개진시킨다. , 작가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을 현실에 체현시켜 동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심적 거리 없이 다가설 있는 교류의 (communicative field) 마련하려는 사명을 지녔다. 이러한 필드를 어째서 마련하는 것인가? 역사는 현실세계의 반면교사이자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김세랑 작가가 선택한, 지금 여기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한 어쩔 없는 숙명의 여행일지도 모른다.


이진명,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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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같은 나의 육신에 시위를 걸다' 연작중 두번째 스케치.
20Cm X 20Cm. 종이에 펜. 회화와 미니어처 조각을 위한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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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ital Photo With Re-touching, 2008.03.31. Serang

매화는 그 단아하고도 화려함으로 오랜동안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아온 꽃이다.

그 진한 향은 美人의 살냄새와 같으니, 한번 빠지면 한동안 정신이 혼미하고,

그 고운 자태와 색은 사각이는 치맛자락의 여운을 연상케 한다.

멋대로 뻗은 가지가 하늘을 잘라내니 그 도도함이야 이루말할 수 없건만,

그 난도질 마저도 아름다우니 그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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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etch For Sculpture & Painting. 18Cm X 18Cm. 종이에 펜.

무심한 현실의 역사는 꿈과 신화를 짓밟는다.
역사의 동검이 신화의 정수리를 꿰뚫을때, 나는 비로소 신화의 부활을 꿈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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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etch. 18Cm X 18Cm. 종이에 펜. 조형작업을 위한 스케치.

잃어버린 신화,
놓아버린 환상,
꿈을 꾸지 못하는 우리.

발굴되는 신화,
펼쳐지는 환상,
현실이 되는 꿈...

나는 오늘 진짜 신화를 만나고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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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cept Sketch For Sculpture & Painting. 18Cm X 18Cm. 종이에 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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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1997년쯤으로 기억한다.
모형 잡지사에 근무하면서 내가 연재하던 꼭지중에 '김세랑의 역사인물 기행'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건 우리 역사속의 유명한 인물들을 미니어처 피겨로 제작하고 그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온전히 내 개인적인 취향으로 밀어부쳐 연재한 꼭지였다.
당시만해도 우리나라에서 모형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 인형제작을 즐기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전통을 소재로한 인형을 만들거나 공부하고 즐기는 사람은 더욱 없었다.
그러다보니 한 인물을 정해 그 모습을 인형으로 재현해낼때 마다 자료부족에 시달렸고, 주말이면 나는 도서관이나 박물관을 찾아 전통 복식이나 무기류, 역사에 대한 공부를 하고 다니곤 했다.

그날은 경복궁에 갔는데, 궁을 보기위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국립중앙박물관(현재는 용산으로 이전)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1층의 도자기 컬렉션을 관람하고 아랫층으로 내려가니 실내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유물들의 보존을 위해서이긴 하지만 주말 오전의 국립중앙박물관은 관람객도 거의 없어 지하층엔 나 혼자만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계단을 내려와 경복궁 미니어처를 보고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복도를 지나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딱 얼어붙고 말았다.

어둠속에 자그맣게 뚫린 누런 창을 통해 검붉은 얼굴 하나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치켜 올라간 눈썹, 불뚝 솟은 코, 핏기가 보이는 듯한 붉은 입술, 그리고 마치 광채가 나듯 번득이는 두 눈동자.
공재 윤두서는 그렇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흠칫 놀랐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니 창이라 생각했던 네모난 부분은 그림의 바탕이 된 변색된 종이였고 그 속에 윤두서의 붉은 얼굴이 있었다.
그래, 이건 내가 잘 아는 그림이다.
교과서에서는 물론이고 미술사와 각종 도록을 통해 수십번도 더 본적이 있는 그림.
직접 마주한 공재의 초상은 내 예상보다 훨씬 작은 작품이었으며 책에 나오는 작은 사진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놀라운 밀도로 이뤄진 그림임을 알 수 있었다.

정정면으로 노려보는 듯한 얼굴위로 한줄기 바람이 스치자 그의 눈썹이 한올한올 춤을 추었으며 속쌍꺼풀이 진 눈은 마치 맹호도의 그것처럼 형형한 안광을 뿜어낸다.
두툼한 눈밑 살을 지나며 튼실한 광대과 나오고 조밀한 필획으로 붉고 탄탄한 피부가 드러나고 있다.
발그레한 콧등은 늠름하고 다부진 입술에 와서는 더욱 붉어지고 마침내 풍성하고도 위엄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수염에 이르러서는 신이 들린 듯한 필획이 황홀할 지경이다.
실제 얼굴 크기와 거의 비슷한 이 그림은 300여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며 공재 윤두서와의 만남을 이뤄낸다.

당시 내가 이 그림을 보고 난 후의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전통 초상화에 대한 지식이 미약했던 내게 공재의 자화상은 서양의 그 어떤 자화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품격과 감동을 전해주었고, 단순히 '잘 그린' 그림이기전에 온전히 윤두서의 인격과 인품, 그의 생각마저도 엿보게 해주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공재는 이 그림을 통해 내게 말을 걸어왔고, 그 목소리는 또렷했다.

"그려라. 나를 그려보아라. 아니, 나와 같은 그림을 그려봐라."

그것은 너무나도 두렵고도 흥분되는 목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덧글: 그동안 이 그림을 설명하는 말들에는 공재가 얼굴을 그리며 몸을 과감하게 생략해 그렸다는 식의 평론들이 많았는데, 실제로 이 그림은 원래 몸도 그려있었다.
공재는 이 그림을 그리며 포(두루마기 형태의 옷)를 입고 있는 것으로 그렸는데, 문제는 이것이 배채법으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배채법은 종이의 뒷면에 윤곽선과 채색을 해서 앞에서 보면 선과 색이 은은하게 나타나게 하는 기법으로, 본래 비단등의 천에 그림을 그릴때 많이 사용하는 기법이다.
이런 원본의 상태를 미처 알지 못하고 그동안 세월이 지나며 여러번의 표구와 배접을 하는 동안에 이 어깨 윤곽선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실제로 일제때 촬영된 '조선사료집진속'에 실린 윤두서의 초상에서는 몸체의 윤곽을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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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 이산이 꾸준한 인기를 받으며 방영중이다.
대왕 세종이나 왕과 나도 있지만, 역시 이산이 인기를 끄는 것은 상대적으로 담담하면서도 따듯한 느낌을 주는 이병훈 감독의 연출력과 '도화서'라는 조선시대 궁중화원을 배경에 깔아 둔 덕일 것이다.
그러나 대장금에서 수랏간을 섬세하고도 감동적으로 그려낸 이병훈 감독이지만, 이번 이산에서 보여지는 도화서는 전작에서 만큼의 디테일과 올바른 지식전달, 그리고 재미를 자아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어용화사로 대표되는 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일이 중요한 에피소드로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사실과 등장하는 소품, 그림의 내용등은 기대에 다소 못미친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의 언급으로 인해 일반인들에게 우리 전통미술과 어진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기에 내가 보는 관점에서의 어진, 그리고 조선시대 초상화에 대해 두번에 걸쳐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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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드라마 이산을 꼬박꼬박 챙겨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 드라마 초기에 등장한 이순재 선생님이 연기한 영조대왕때문이었다.
로보트같은 연기에 앵무새와도 같은 대사, 탈을 뒤집어 쓴 듯 무표정한 얼굴의 정조와는 달리 영조는 군주의 위엄과 지혜, 결단력을 온전히 표현했고, 무엇보다 내가 익히 알고 있었던 실제 영조대왕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한 외모와 이미지를 풍겨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 사진에서 제일 왼쪽의 인물이 바로 영조대왕께서 즉위하시기 전인 영인군 시절의 초상이다.
치켜진 눈썹, 날카로운 눈매, 단정한 자세등에서 장차 보위에 올라 천하를 호령하는 군주의 면모가 엿보인다.
뒤이어 설명하겠지만, 훗날 보위에 오르신 후의 어진과 비교해 보면 조선시대 초상화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가운데의 철종 어진은 일반적인 용포차림이 아닌 구군복을 착용한 상태로 그려졌는데, 이로 미루어볼때 철종께서 이 어진을 그릴즈음에서는 군주로써의 위엄을 나타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구군복은 조선 후기의 표준 군복으로, 요즘으로 치자면 대통령이 군복을 갖춰입고 표준 사진을 찍은 것과 같다)
이 두 그림은 모두 왕실에서 관리하던 진본이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인해 화를 입어 절반만 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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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 금관조복(제를 올리거나 나라의 공식행사때 입는 행사복)을 입은 인물은 채제공의 초상이다.
드라마 이산에서 '번암대감'으로 불리며 정조를 보필하는 역할로 한인수씨가 연기하고 있는 바로 그 분이다.
이 그림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흥미로운 사실 한가지를 알 수 있는데, 이분의 눈이 '사시'라는 것이다.
사시, 즉 사팔뜨기로 그려진 눈은 그림을 그린 화공의 실력이 부족하거나 실수가 아니라 실제 채제공께서 이같은 사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던 이명기의 이 그림은 조선시대 초상화의 기본이었던 '터럭 한올, 점 하나라도 사실과 똑같이 그린다'라는 당시 초상화의 전통을 그대로 보여준다.

왼쪽의 영조어진은 나이가 들어 수염이 반백이 되었지만 여전히 영인군 시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실제 영조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치켜올라간 눈매, 당시는 좋지 않겨 여겼던 매부리코등으로 보아 임금이라 하여 특별히 더 아름답게 그리는 식의 허세를 부리지 않았음을 잘 알 수 있다.
바로 이 모습이 실제 영조의 모습이며, 드라마 이산에서 보여지는 이순재 선생님의 모습과 비교해도 잘 매치가 되는 인상이다.(아마도 캐스팅때 이 어진의 이미지가 크게 작용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도 잘 아는 단원 김홍도 역시 어진화사중의 한명이었는데, 그는 생전에 영조와 정조의 어진을 그린바 있다.
이 영조어진은 육상궁 냉천전에 보관되고 있던 영조어진의 모사(원본을 그대로 베껴그림)본으로, 1900년에 그려진 것인데, 어쩌면 이 그림의 원본은 단원 김홍도가 그린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용화사는 어용도감이라는 임시기관을 설치한뒤 도화서 내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검증받은 화원이 선발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전국의 이름난 화공들을 모아놓고 시험을 치룬뒤 그 실력이 최고라고 인정을 받아야만 참여할 수 있는 영광이었기에 드라마에서 처럼 수종 다모 출신의 성송현이 정조의 어진을 그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단원 김홍도를 등장시키고 송현이 그를 보필하는 수종화사로 등장했다면 드라마의 재미는 물론이고 그 개연성도 다소 높아질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한편, 조선 최고의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습과는 실제 모습이 많이 달랐다.
실록에서 전하는 그의 모습과 비공식적으로 존재하는 정조의 초상(조선왕실 족보에 나오는 초상)을 보면 그는 전형적인 무골이었고 몸집이 비대했음을 알 수 있다.
거친 수염과 무서운 얼굴, 기골이 장대하고 살집이 많았던 정조대왕은 실제로는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같은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정조는 지나친 독서로 인해 눈이 많이 나빠서 안경을 항상 착용했으니 드라마에 나오는 정조의 모습과는 현저히 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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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의 본가 경기전에 보관중인 태조 이성계 어진.
청색의 곤룡포를 입고 정좌한 상태로 그려진 이 태조어진은 수많은 화재와 난리로 인해 불과 몇점 되지않는 어진중에서도 그 존재가치가 높은 어진이다.
이 어진은 원본의 모사본으로, 진본은 따로 보관되고 있다.
조선을 건국한 장본인인 태조는 그 출신이 무관이었을뿐만 아니라 '신궁'이란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뛰어난 장수였다.
아래 일제시대때 촬영된 원본의 유리원판 사진을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는데, 큰 귀에 광대뼈가 발달하고 단단해 보이는 입매와 풍성한 구렛나룻, 강직한 수염등이 태조의 성정과 인품을 잘 말해주고 있다.
과거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지금은 작고하신 고 김무생씨가 이성계를 연기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태조의 어진이 남아있었기에 그 이미지를 유추해낼 수 있었고, 김무생씨의 이미지가 태조와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어진들에는 공통된 몇가지가 보이는데, 사진이나 동영상이 없던 시대에 어진은 역대 임금들의 외모뿐만 아니라 그의 인품이나 업적, 통치이념까지도 그림속에 담고자 했다는 것이다.
외모는 충실히 묘사하되 군주의 인품과 느낌까지도 담아내고자 노력을 했고, 강력한 군주의 이미지가 필요할때는 군복을 떨쳐입은 당당하고 강력한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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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차원에서 이제 보게될 세종대왕 표준 어진은 매우 실망스러운 그림이다.
혜촌 김학수 화백이 현대에 와서 그리신 이 그림은 분명 우리가 아는 세종대왕의 이미지 - 온화하고 자상하며 한없이 너그러운 - 이지만, 문제는 실제 세종대왕의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는 점이다.
세종은 평소 몸에 병을 달고 살았는데, 이는 요즘으로 치면 성인병 때문으로 세종이 본디 상에 고기가 없으면 수라를 들지 않았을 정도로 육식을 너무나 즐겼고 수많은 후궁과 첩을 두었을 정도로 색을 밝혔으며 서책보기에 열중하다보니 안질이 와서 몹시 고생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대왕의 그 위대한 업적과는 별개로, 그의 용모는 지나치게 비만이었고 온갖 피부병과 안질로 몸이 몹시 상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원래 세종대왕의 어진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 진실은 뭍혀버렸지만, 기록의 정확도에서 타의 추정을 불허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건데 실제 세종과 그의 '진짜 어진'의 모습은 분명 드라마 대왕세종에 등장하는 김상경이나 이 어진의 모습과는 달랐을 것이다.

얼마전 TV에서 청와대에 대한 다큐를 보다보니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들이 등장하던데, 그저 증명사진을 모사한 것에 불과해보이는 단순한 초상화들의 모습에 실망했던 기억이 새롭다. 비록 위대한 왕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데에는 다소 불리할지라도 실제 모습을 정확히 묘사한 뒤에 그 속에서 그분의 인품과 업적을 담아내고자 했던 옛 화사들의 전통과 실력을 잇는 화백과 어진은 현대에 나올 수 없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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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은...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에 대한 최소한의 기억이다.

기억은...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한 불완전한 사실의 추억이다.

추억은...
내가 사랑한 누군가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이다.

팔레트에는 나의 흔적과 기억, 그리고 추억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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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벼르고 벼르던 빈센트 반 고흐전에 다녀왔습니다.
반드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너무나 유명한 그 이기에 서울 시립미술관은 미술 전시회가 아닌 시장판 처럼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아마도 제가 다녀본 미술전시중 가장 사람이 많은 전시였던 것 같습니다.

미술학도 시절, 고흐는 여느 미대생에게나 그랬듯이 마음속의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림 속으로 빠져들고 싶을 만큼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별이 빛나는 밤]은 물론이고 눈부시게 화려한 [해바라기], 그리고 귀를 자른 고흐의 자화상은 철없는 예비작가의 가슴을 미치도록 휘저어놓는 최고의 걸작이었습니다.

그의 예술과 삶을 탐닉하다가 그가 세상을 떠난 날짜인 7월 29일이 제 생일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았을때는 마치 고흐의 영혼이 내게 들어오기라도 한듯이 전율에 떨었더랬습니다.
물론, 그의 생몰연대는 저와는 큰 차이가 나므로 사실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내 영혼속에는 고흐의 정신이 들어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덕분에 미술을 하게된 것은 운명이다 라는 황당한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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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중의 하나는 그가 생전에 했던 말 한마디였습니다.
"내 그림이 물감튜브 한조각 값보다는 훨씬 가치가 있다는 것을 언젠가는 알게될 것이다"
 
피를 토하듯 외치는 그의 모습이 떠오르는 이 처절한 고백은 고흐의 삶과 정신세계를 한마디로 대변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림을 그린 평생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해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외톨이였으며, 살아 생전에 단 한점의 유화를 팔았고 미치광이 소리를 들어가며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린 사람입니다.
마치 화폭과 싸움을 하듯 찍고 그어댄 물감으로 만들어진 그의 [자화상]과 [담배를 문 해골]이 묘하게 겹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평생 삶과 세상, 그리고 자신의 영혼과 싸워가며 죽음과 구원을 노래했습니다.
밋밋한 인쇄물이나 리프린트가 아닌 실물로 대한 그의 그림은 평면임에도 평면이 아니었습니다.
'전투적인' 그의 붓터치는 화면에 나무를 세우고 풀을 자라게 했으며 바람이 불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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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사진을 통해 그저 고운 정물화쯤으로 알고 있었던 붓꽃그림인 [아이리스]가 그토록 처절한 그림일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날이 서듯 선명한 원색과 각진 터치는 광기어린 색과의 싸움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오늘, 그의 그림들을 실제로 보기전까지 내 머리속에 있는 고흐의 이미지는 '카드뮴 옐로우' 였습니다.
태양과도 같이 강렬한 노란색은 대표작인 [해바라기]를 비롯해 고흐의 그림 곳곳에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이런 생각은 오늘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고흐의 그림은 냉철함의 상징과도 같은 '코럴 그린'이 곳곳에 들어있었고, 특히 그의 '블루'는 마치 심연과도 같은 슬픔을 가득 담은 블루였습니다.  

고흐의 그림에서는 그의 고통과 슬픔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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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로, 이번 전시에서 제가 가장 감명깊게 본 작품은 바로 이 작품입니다.
[비탄에 잠긴 노인]은 고흐의 작품중에서는 이례적으로 원색이 많지 않은 작품입니다.
병원을 연상시키는 흰벽을 배경으로 의자에 앉아 몸서리치는 슬픔에 얼굴을 가린 이 노인의 모습에서 전 고흐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잔인하리만큼 소외되고 외로왔으며 미치도록 간절했던 그의 예술세계를, '제발 좀 나의 세계를 알아달라! 나는 미쳐버렸다!' 라고 절규하는 고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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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예술계에서 '불멸'이라는 호칭이 허락되는 인물은 단 두명뿐입니다.
장애와 무관심과 싸워 이겨낸 불멸의 음악가인 악성 '베토벤', 그리고 정신과 삶을 모두 저당잡힌채 예술혼을 불사른 '고흐'입니다.

오늘, 그 '불멸의 영혼' 고흐의 열정이 절 설레이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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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로 아름답고 완벽한 공간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無의 공간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완벽한 무의 공간은 존재할 수 없기에 
공간은 필연으로 나눠지고 채워지게 된다.
분할은 그래서 현실의 미학이다.
저녁을 먹기위해 들른 식당의 천정이 제법 눈을 즐겁게 하는 분할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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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익스의 마리오네트 뮤직비디오 작업에 이어서 2008년 첫번째 뮤직 비디오 미술작업이 진행중이다. 내일 촬영에 들어가는 작품과 이번 주말에 또 한편이 있으니 이번주는 거의 달려주는 분위기가 될 듯. 세트작업중 2개의 벽을 만든 벽화작업을 올려본다.
(4m X 3m/ 합판/ 폴리코트/ 수성 페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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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모 감독 왈; "붓을 잡으면 신들린 듯이 붓질하며 사람이 달라진다."
나;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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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에 질감을 내고 페인트로 그려 표현한 낡은 회벽과 녹슨 타공 철판으로 표현된 메탈릭한 느낌의 벽이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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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감을 보기위한 모델로 등장한 랩터. 역시 랩터는 이런 배경이 어울리는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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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기념 한 컷. 인형작업도 좋지만 시원시원한 붓질과 마음껏 머리속의 이미지를 펼쳐보일 수 있는 이런 미술작업이 개인적으로는 훨씬 즐겁고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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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신화도,
더이상의 환상도,
그리고 꿈마저 꾸지 못하는 현대인...

컴퓨터 게임 공간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깊은 기억 속의 꿈을 슬그머니 끄집어내는 현실.

신화가,
환상이,
꿈은 살아 숨쉬는 것.

화석이 되어버린 이 거대한 뼈대가
나의 녹슨 꿈을 부활시킨다..


2007. 09. Sketch. 미니어처 작업후 2m X 8m 대형 조형물로 완성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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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친절하다.
언제나 밝은 미소와 몸에 밴 친절로 누구에게나 행복한 만족감을 주는 '그'.
이웃 사무실의 미스 조를 보고 예의 사람좋아보이는 함박웃음을 짓던 그의 입술이 씰룩이더니,
이내 애벌레가 허물을 벗듯 훌러덩 뒤집어지며 탈피하는 '그'.

밝은 미소를 짓게하던 입주위의 근육이,
써클렌즈를 낀 듯 반짝이던 그의 눈이,
복날에 아이스크림 녹듯 흘러내리곤 뻘겋게 녹이 슨 골격이 드러난다.

아름답다.
치장하지 않은,
장식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아름답다.

골격은 여전히 튼튼하다.
젤라틴 처럼 녹아버린 근육이 없어도 그의 뼈대는 여전히 열심히 일을 한다.
결제서류의 사본을 만들고 커피 한모금을 홀짝이자
커피가 그의 척추를 타고 흘러내려 발밑에 고인다.

"똑똑~!" 옆 사무실의 미스 조다.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2007. 09. Sketch. 미니어처 제작후 등신대로 조형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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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날개 하나를 가지고 싶다.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는 날개도 좋긴 하겠지만,
그보다는 내 마음과 생각의 한계를 없애줄... 그런 날개 하나를 가지고 싶다.
견갑골 밑에서 간질거리는 느낌이 나는 것만 같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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