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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19
    지하실에서 윤두서를 만나다 - 조선의 초상 두번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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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1997년쯤으로 기억한다.
모형 잡지사에 근무하면서 내가 연재하던 꼭지중에 '김세랑의 역사인물 기행'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건 우리 역사속의 유명한 인물들을 미니어처 피겨로 제작하고 그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온전히 내 개인적인 취향으로 밀어부쳐 연재한 꼭지였다.
당시만해도 우리나라에서 모형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 인형제작을 즐기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전통을 소재로한 인형을 만들거나 공부하고 즐기는 사람은 더욱 없었다.
그러다보니 한 인물을 정해 그 모습을 인형으로 재현해낼때 마다 자료부족에 시달렸고, 주말이면 나는 도서관이나 박물관을 찾아 전통 복식이나 무기류, 역사에 대한 공부를 하고 다니곤 했다.

그날은 경복궁에 갔는데, 궁을 보기위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국립중앙박물관(현재는 용산으로 이전)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1층의 도자기 컬렉션을 관람하고 아랫층으로 내려가니 실내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유물들의 보존을 위해서이긴 하지만 주말 오전의 국립중앙박물관은 관람객도 거의 없어 지하층엔 나 혼자만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계단을 내려와 경복궁 미니어처를 보고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복도를 지나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딱 얼어붙고 말았다.

어둠속에 자그맣게 뚫린 누런 창을 통해 검붉은 얼굴 하나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치켜 올라간 눈썹, 불뚝 솟은 코, 핏기가 보이는 듯한 붉은 입술, 그리고 마치 광채가 나듯 번득이는 두 눈동자.
공재 윤두서는 그렇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흠칫 놀랐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니 창이라 생각했던 네모난 부분은 그림의 바탕이 된 변색된 종이였고 그 속에 윤두서의 붉은 얼굴이 있었다.
그래, 이건 내가 잘 아는 그림이다.
교과서에서는 물론이고 미술사와 각종 도록을 통해 수십번도 더 본적이 있는 그림.
직접 마주한 공재의 초상은 내 예상보다 훨씬 작은 작품이었으며 책에 나오는 작은 사진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놀라운 밀도로 이뤄진 그림임을 알 수 있었다.

정정면으로 노려보는 듯한 얼굴위로 한줄기 바람이 스치자 그의 눈썹이 한올한올 춤을 추었으며 속쌍꺼풀이 진 눈은 마치 맹호도의 그것처럼 형형한 안광을 뿜어낸다.
두툼한 눈밑 살을 지나며 튼실한 광대과 나오고 조밀한 필획으로 붉고 탄탄한 피부가 드러나고 있다.
발그레한 콧등은 늠름하고 다부진 입술에 와서는 더욱 붉어지고 마침내 풍성하고도 위엄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수염에 이르러서는 신이 들린 듯한 필획이 황홀할 지경이다.
실제 얼굴 크기와 거의 비슷한 이 그림은 300여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며 공재 윤두서와의 만남을 이뤄낸다.

당시 내가 이 그림을 보고 난 후의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전통 초상화에 대한 지식이 미약했던 내게 공재의 자화상은 서양의 그 어떤 자화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품격과 감동을 전해주었고, 단순히 '잘 그린' 그림이기전에 온전히 윤두서의 인격과 인품, 그의 생각마저도 엿보게 해주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공재는 이 그림을 통해 내게 말을 걸어왔고, 그 목소리는 또렷했다.

"그려라. 나를 그려보아라. 아니, 나와 같은 그림을 그려봐라."

그것은 너무나도 두렵고도 흥분되는 목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덧글: 그동안 이 그림을 설명하는 말들에는 공재가 얼굴을 그리며 몸을 과감하게 생략해 그렸다는 식의 평론들이 많았는데, 실제로 이 그림은 원래 몸도 그려있었다.
공재는 이 그림을 그리며 포(두루마기 형태의 옷)를 입고 있는 것으로 그렸는데, 문제는 이것이 배채법으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배채법은 종이의 뒷면에 윤곽선과 채색을 해서 앞에서 보면 선과 색이 은은하게 나타나게 하는 기법으로, 본래 비단등의 천에 그림을 그릴때 많이 사용하는 기법이다.
이런 원본의 상태를 미처 알지 못하고 그동안 세월이 지나며 여러번의 표구와 배접을 하는 동안에 이 어깨 윤곽선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실제로 일제때 촬영된 '조선사료집진속'에 실린 윤두서의 초상에서는 몸체의 윤곽을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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