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코앞에 둔 지난주 목요일 밤, 세 남자가 모여 수다를 떨다가 갑자기 내가 말을 꺼냈다.
"우리 여행이나 갈까? 사천 박물관에 있다는 쎈츄리온이랑 T-34보러. 어때?"
평소 각자 일하는 분야는 다르지만 모형제작이라는 공통점과 각기 살아가는 인생이야기를 하기 좋아해서 뜻이 맞던 우리는 내 뜬금없는 말에 일제히 눈을 반짝이며 쳐다본다.
"갈까?" - 나.
"가지 뭐." - J씨.(전 A모형사 근무. 현재 의류업을 하며 중국 광저우 거주중)
"좋다, 가자!" - S씨.(영상/음반업계 종사자)
다음날인 금요일 저녁, 우리는 번잡한 여행준비나 계획도 없이 그저 몸만 밴 한대에 싣고 서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경남 사천시 KAI-한국 항공 산업(주) 사옥 옆에 위치한 항공우주 박물관은 1990년대 말에 생긴 신생 박물관으로 과거 여의도 안보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던 전시물의 일부와 자체적으로 마련한 전시물이 합쳐져 생겨난 군사관련 박물관으로, 전반적인 전시물의 수준은 미미하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 전시물 몇점이 포함되어 있어 전문가들에게는 나름대로의 관심을 끄는 장소다.
이른 아침부터 세명의 시커먼 사내들이 박물관 앞에 나타나자 매점 아주머니가 신기한듯 물어온다.
"여기 박물관 보러 왔쓰예?"
내려오며 우리끼리 했던 "아마 서울에서 사천까지 탱크 한대 보러 내려가는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을꺼다"라는 말이 실감나는 질문이 아닌가.
C-47.
2차대전부터 사용된 수송기로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전쟁 이후 상당기간 동안 사용되었다. 영화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공수부대원들의 D-Day 공수작전에 사용된 기체로 유명한데, 국내에서는 이곳에 있는 것과 인하공전에 전시된 것 두대뿐이다. 내부를 보고 싶었지만 폐쇄되어 있는 것이 아쉽다.
F-4U 콜세어.
너무나도 유명한 2차대전 당시의 해군기다. W자로 꺽인 날개가 상징이며 한국전쟁에서도 활약한 걸작기체이며 고유의 아름다움은 지금도 많은 애호가들을 거느린 기체. 국내에서는 이곳에 전시된 것이 유일하다.
B-29.
태평양 전선에서 원자폭탄 두발을 떨어뜨려 일본을 굴복시키고 우리나라에 해방을 안겨준 의미심장한 기체. 과거 여의도 안보전시장에 전시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이곳으로 옮겨져 있으며 역시 국내에서는 유일한 전시기체이다. 조종석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장비가 제거되어 있어서 의미는 없다.
이름은 '항공우주 박물관'이지만 우리나라의 모든 박물관이 그렇듯 빈약한 전시물을 메꾸기 위해 탱크같은 지상 장비도 몇대가 있는데, 그 몇대가 우리같은 전문가들에게는 나름 의미있는 것들이다. 비록 전시상태와 전시물의 상태가 무척 안좋긴 하지만 이녀석들을 보기위해 서울에서 무려 500여 Km를 달려 내려왔으니 말이다.
T-34/85.
이곳까지 내려온 이유중의 하나로 세 남자 모두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차량이다. 2차대전중 독일의 침공에서 소련을 구해낸 주역인 T-34는 서울의 전쟁기념관에도 있지만 정확한 2차대전형이 아닌 전후 제3국에서 사용된 형식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 전시된 차량은 비록 상태가 안좋고 차체 곳곳을 고증과는 담을 쌓은 상태로 개조되어 있기는 하나 포탑만큼은 완벽한 2차대전~한국전 사용형을 보여주고 있다. 차체가 이상하게 개조된 이유는 이 차량을 중국에서 수입해왔는데, 당초에는 가동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기위해 2차대전형의 차량에 T-55의 엔진과 미션, 부품들을 이용해 개조를 가했던 것이다. 현재는 그나마 박물관에 방치하며 가동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멀쩡히 달릴 수 있는 T-34는 세계적으로도 흔치않은데, 그 좋은 전시물을 고철로 만들어버린 관계자들의 무식함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쎈츄리온(Centurion).
바로 이 차량이 우리를 사천까지 오도록 인도한 주역이다. 국내 유일이자 아시아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영국제 전차인 센튜리온은 과거 여의도 안보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던 것이다. 2차대전 직후 채용되어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센츄리온은 이후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사용되며 화려한 전과를 기록하게 되는데, 한국전쟁에 사용된 이 초기형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전시물이다. 투박하면서도 기계적인 맛이 물씬 풍기는 영국제 전차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센츄리온'의 이름은 과거 로마군의 '백인대장'을 뜻하는데, 세 남자 모두 이 녀석 주변에서 너무 좋아 어쩔줄 모르며 한참을 살펴보았다.
C-123 수송기의 내부 전시관에서 발견한 어이없는 전시물. 현역 공수부대원의 복장을 한 마네킹에 2차대전 당시 미해병대의 철모와 위장무늬 커버가 씌워져있다. 덕헌터 철모커버로 불리우는 이 위장무늬 커버는 굉장히 실물이 귀한 레어 아이템인데, 놀랍게도 이 미스매치의 전시물에 씌워진 철모와 철모피 모두 오리지널이다! 전시물을 보호하는 아크릴 판을 뜯어버리고 가져오고 싶은 폭발적인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해야만 했다.
아울러 오른쪽은 한국전쟁 당시 공수작전을 수행한 미 공수전투단 187RCT의 공수부대용 오리지널 철모. 역시 실물을 보기가 매우 힘든 귀한 전시물인데 아무런 설명없이 그냥 덩그러니 놓여 있어서 안타까왔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서울로 진격해오는 사진으로 유명한 사이드카.
원래 독일제 BMW R-75가 오리지널이지만 한국전때 북한군이 사용한 것은 독일제를 중국이나 소련에서 카피 생산한 것을 지원받아 사용되었다. 이 전시물은 1973년, 서울 안국동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전후에 민간용 탈것으로 쓰이다 버려진 것이 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역시 희귀한 전시물인데 설명이 부족했던 좋은 전시물.
북한의 한 장교가 소련군 장군에게서 선물받아 가지고 있다가 노획한 군용 지휘도라고 되어 있는 이 칼의 정체는 소련의 전설적인 용사인 코사크 부족들의 전통칼인 '싸스카'다. 두툼한 곰털모자와 휘날리는 붉은 망토, 그리고 허리에 찬 길고 위로 굽은 칼인 싸스카를 들고 말을 달리는 기마병 코사크 부족의 상징을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이 타던 소련제 전용차.
연합군이 북진중에 노획한 것으로 역시 과거에는 여의도 안보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던 것이다.
M42 Paratrooper's Jump Suit.
나를 비롯해 일동을 경악하게 만든 놀라운 전시물. 전세계적으로 실물이 극히 귀한, 그것도 실전에 참전한 참전자의 유품이자 등에 퍼스널 페인팅까지 되어 있는 2차대전 당시의 미공수부대 점프수트의 실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입고 있는 옷이 바로 이것으로, 군사전문가로의 나를 조금만 아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이옷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저 실물 점프수트가 있는 것 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뒷면의 페인팅으로 보아 한국전 당시 참전한 187RCT 대원의 옷이 분명한 이 옷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엉뚱한 전시 섹션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이 정도의 전시물이라면 앞서 헬멧과 함께 별도의 전시관 하나를 만들어도 족할 유물인데 이렇게 방치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서울에서 사천으로 내려와 새벽에 여관방에 지친 몸을 눕혔을때의 스케치. 최소한의 인권보호를 위해 모자이크는 필수적이었다. 기록정신이 투철한 나와 S씨가 놓칠 수가 없었던 명장면인 J씨의 '죽음에 가까운 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