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돌리니 이제야 뭔가 제대로 된 조형물, 아니 건물이 나타난다.
실물크기의 세배쯤되는 T-34/85 탱크를 완벽에 가깝게 재현한 거대한 전시관은 전세계 어느 군사박물관에서도 본 적이 없는 참신한 시도다.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과 영국등지의 박물관들을 순례했던 나나 유럽쪽 박물관들을 섭렵한 J씨도 모두 감동한 이곳 최고의 조형물이 바로 이것이다.
이름은 탱크전시관으로 되어있어서 큰 기대를 안고 들어갔는데, 막상 내부에는 별다른 것 없이 그저 전시구역으로 향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어서 진한 배신감에 입술을 깨물어야 했지만 어쨌든 건물의 제작방식이나 특히 실감나는 색칠은 칭찬할만 하다.
세계 최대의 디오라마 전시장이라는 부제가 붙은 전시구역은 역시 '낚시'에 불과했다.
전형적인 박물관식 디오라마(배경은 그림으로, 원근감을 적용해 크기를 달리한 인형들을 배치하는)들이 눈앞에 펼쳐졌고 그 퀄리티도 좋다라고 평가하기엔 많이 미흡하다.
내가 아는 한 세계 최대의 디오라마 전시관은 영국의 덕스포드 RAF 뮤지엄과 Wool에 위치한 탱크 뮤지엄인데, 밀랍인형과 1:1크기로 만들어진 수준높은 디오라마들이 가득하다.
지자체들이 수익창출 내지는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펑펑 돈을 뿌려대며 진행한 대표적인 관치행정의 표본같은 전시다.
신랄한 혹평을 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효과적인 부분들도 있기는 하다.
벽을 뚫고 나올 듯한 T-34 진격 디오라마나 끊어진 한강철교를 건너는 피난민 디오라마등은 상당히 실감나지만, 문제는 이것들이 '재활용 작품'이라는 것.
수년전에 한국전쟁 50주년 기념으로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열렸던 '아, 6.25'전을 위해 만들어지고 전시되었던 것을 옮겨와 재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길을 걷다보면 머리위에서 헤드샷을 노리는 국군 병사들의 총구에 깜짝 놀라게 된다.
마네킹 아저씨의 눈빛이 제법 매서운데 그냥 앞모습만 보고 감동 받기를.(길을 지나쳐 뒷모습을 보면 좌절하게 된다)
고증을 거쳐 정밀한 전시공간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쫄딱 망한 영화 '흑수선'의 촬영용 세트다.
사료적인 가치는 물론이고 간접체험의 효과도 거의 없는, 참으로 암담한 전시장이었다.
실망에 실망을 거듭한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들어간 실내 전시장은 그나마 조금 나았다.
한국전쟁 당시에 사용된 총기들이 제법 전시되고 있었기 때문.
적성장비 코너에서 재미있는 물건을 발견했는데, 사진에 보이는 접절식 캐머리판의 AK-47S는 무려 북한 생산제품이다.
'58식'이라는 각인이 또렷하게 보이는데, 아마도 강릉 잠수함 무장공비 사건때 노획한 화기로 생각된다.
비록 허술하고 무성의한 전시물의 나열로 점철된 실망스러운 박물관이었지만, 그래도 빛바랜 회색의 나무기둥과 녹슨 철조망은 언제나 보는 이들의 가슴을 처연하게 만드는 풍경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서 그나마 가장 우리 일행을 숙연하게 만든 곳이 바로 이 사진에서 보이는 벽만 남은 당시의 진짜 수용소 건물 잔해이다.
세월의 풍상과 탄흔, 수용자들의 참혹한 생활이 눈에 보이는 듯한 이 담벼락만이 진정한 박물관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J씨는 깜찍하기 이를데없어서 이런짓 저런짓을 해도 모두 잘 어울린다.
초상권을 보호해줘야 하는데, 귀차니즘 + 뽀샵질로도 어쩔 수 없는 매력덩어리 표정땜에 그냥 올려버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거제도에 왔으면 '멍게 비빔밥'을 먹어줘야 한단다.
바다내음이 물씬 나는 멍게 비빔밥은 생전 처음 먹어보는 나름대로의 별미였고, 특히 옆에 딸려나온 우럭 지리탕은 비리지도 않고 국물맛이 시원한 것이 아주 일품이었다.
세 남자의 여행기는 여전히 계속됩니다.